아직은 쌀쌀한 초봄, 벚꽃이 만개하기엔 이른 시기입니다.
갓 시작된 대학 생활은 별다른 일이 없어도 어딘지 바쁘다는 인상을 줍니다.
세이지가 평소와 다름없는 성실한 하루를 보낸 뒤, 집에 막 도착했을 즈음이었습니다.
짧은 진동소리와 함께 휴대전화의 알림이 울립니다.
꽤 오래 잊고 지냈던 이름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해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연락도 연락이지만, 새로 시작하겠다니요.
원래도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지만, 직장도 집도 전부 떨친 채 이렇게까지 대책 없는 결정을 할 사람이 아니었는데요.
세이지는 답장을 보내보거나 전화를 걸 수 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액정을 한참 응시한다. 그곳에 떠있는 낯익은 이름 때문인지, 낯선 내용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이름 위에 떠 있는 날짜까지 묘한 위화감이 든다 했더니. 메세지 창으로 들어가서 몇 문자를 적어 전송한다.) [미쳤어요?]
세이지가 답장을 보내자, 고민한 보람도 없이 메시지에는 곧장 읽음 확인 표시가 뜹니다.
사에키 키요시:[차라리 그런 편이 나았을 텐데.]
알 수 없는 메시지와 함께 곧바로 뒤를 이어 도착하는 메시지들.
사에키 키요시:[어쨌든 생일은 혼자 보내야겠네. 이래 봬도 약속은 지키고 싶었는데 말이지.]
[……역시 후회되네. 미안해하지 말라는 말이라도 지키고 싶었는데 미안.]
후지세키 세이지:...... (아, 이 사람은 뭐가 문제지? 그런 생각에 눈이 찌푸려진다.)
[약속인 줄 몰랐어요.]
[의도를 모르겠어서 그러는데, 열 받으라고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죠?]
[말했잖아. 예뻐한다고.]
[뭐, 못 믿는다고 해도 이젠 상관없지만.]
[세이지, 지금 인상 찌푸리고 있지?]
후지세키 세이지:[안 믿어요.] (끝에는 뭔가 덧붙이려 하다 말았다. 그건 누가 봐도 잔여물같은 것이었으니까.)
[알고 하시는 거 맞네.]
[거기에 뭐 있어요?]
사에키 키요시:[세이지, 네가 모르는 건 나도 몰라.]
[글쎄... 여기 뭐가 있더라. 모르겠네.]
그러더니 사에키는 자신이 여행하고 있던 곳을 짤막하게 보내줍니다.
사에키 키요시:[대학생도 됐겠다, 나중에 놀러와. 시골 마을치고는 꽤 볼거리는 많으니까.]
후지세키 세이지:(사진 몇 장을 넘겨가며 대충 눈으로 훑었다. 꽃이 조금 덜 핀 나무나 물가가 걸려 찍힌 사진을 보자니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시골 마을... 진짜 안 어울린다.)
[밥집도 있죠?]
[생일쯤 갈 테니까, 내년부터는 안 사주셔도 돼요.]
한참이나 답이 없던 사에키로부터 얼마 뒤 답장이 도착합니다.
사에키 키요시:[미안, 그땐 내가 없을 것 같네.]
[뭐, 어쨌든.]
[세이지. 나는 너 정말 예뻐했어.]
이후로는 키요시에게 문자를 보내도 답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확인 역시 하지 않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후지세키 세이지:(상관 없는 일을 왜 재차 짚어주시는지. 일방적으로 끝난 메세지 창을 끌어올려 마지막 문장을 곱씹었다.
올해 생일은 같이 못 보내겠네. ... ... 한 번쯤 가려고 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이대로는 언젠가 불현듯 아무렇지 않게 발을 들이밀 것 같으니까. 오늘처럼.)
(그러니 마지막은 필요했다. 애매한 약속이나 변명, 어떤 구실도 남기지 않는 진짜 마지막.)
세이지는 직접 키요시가 있는 곳에 방문해보기로 합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확인해보기 위해서든, 화가 나서 그에게 따져묻기 위해서든.
아니라면 두 사람에게 필요한, 그 어떠한 구실도 남기지 않을 마지막을 위해서든.
세이지가 떠나는 날 아침, 밖에는 얕은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한겨울만큼은 아니지만 조금 추운 기분이 드네요.
세이지는 키요시가 향했던 아오모리로 향합니다.
워낙 인적이 드문 조그만 마을이라는 게 이점이었을까요?
세이지는 길을 물어 키요시가 머무르고 있다는 아오모리의 마을에 도착합니다.
그나마 이곳에서는 관광지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시골이라 그런지 길이 정돈되어 있지 않고 나무가 많아 헤매기가 쉬울 것 같네요.
낯선 길에서 꽤 헤맨 끝에 세이지는 해가 지고 난 후에나 마을같아 보이는 곳을 찾습니다.
마을로 가는 길에는 강물이 흐르고, 적당한 언덕 위에 나무로 된 다리가 있습니다.
다리는 밟으면 삐걱이는 소리가 나지만 무너질 걱정은 없이 튼튼해보이네요.
계속해서 내리는 비 탓에 강물이 조금 불어나있는 게 보입니다.
빗 속에서 오래 걸은 세이지 역시 체온이 떨어져 추워지기 시작합니다.
강 건너를 살펴볼 경우에는 검은 우산을 쓴 사람이 서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 기준치: | 65/32/13 |
| 굴림: | 6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검은 우산을 쓴 사람은 마치 세이지가 다리를 건너오는 것을 가만히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건너편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옵니다.
소티스:후지세키 세이지 씨죠. (군더더기 없는 단정한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너의 이름을 불렀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함께 가시죠, 안쪽에서 키요시가 기다리고 있어요.
후지세키 세이지:(걸리는 것 없이 발음하는 이름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제가 오는 거, 알고 있어요?
소티스:...그 사람이 그랬거든요. 자기가 아는 후지세키 씨라면 올지도 모르겠다고요.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였다.) 혹시나 해서 마중을 나와봤는데 정말 오셨네요.
우선은 실내로 가시겠어요? 비가 많이 오네요.
후지세키 세이지:비가, ... (이렇게 비가 오는데, 고작 그 말 한 마디 때문에 기다렸다고? 의아함에 시선을 내리면 상대의 젖은 옷자락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네. 가요.
소티스:(그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을 서서 걸었다. 살가운 말이나 대화는 붙이지 않는다. 빗소리와 비에 젖은 땅을 밟는 소리가 계속된다.)
소티스는 세이지를 앞장선 채 조용한 마을의 거리를 걸어 2층짜리 주택 앞에 도착합니다.
우산을 접고 자연스럽게 문을 연 소티스가 세이지를 안으로 들입니다.
소티스:저 왔어요. (실내를 향해 말하는 목소리가 자연스러웠다. 먼저 신발을 벗더니 익숙하게 안쪽으로 향했다.)
……안에 있는 사람을 향해 하는 인사말이겠죠.
안으로 들어가, 우산을 접고 있을 때 실내에서 사람이 나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잠시 소티스와 대화를 나누던 키요시가 마침내 현관 쪽에 모습을 드러내 세이지를 마주봅니다.
기다렸다는 듯 두 개의 시선이 마주치고, 세이지의 눈에 보이는 키요시는……
사에키 키요시:...진짜로 왔네. (태연하게 웃으면서 속이 편한 소리나 했다.) 멀진 않았어? 꽤 고생했겠는데, 날씨도 이래서.
후지세키 세이지:... ...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이 잠시 길어졌다.) 어떻게 아셨네요, 온다는 말도 안 했는데.
사에키 키요시:글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나. (여전히 단조로운 목소리다.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받아보고 있으면 입매는 반사적으로 접혔다.) 아니면 그러길 바랐나, 내가.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키요시도, 멀찍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소티스 역시 태연한 모습입니다.
세이지가 핸드폰이나 신문, 달력 등을 통해서 올해의 연도를 확인하면 10년 정도 흘러 있습니다.
사에키 키요시:뭐... (근처에 있던 수건을 들어 네게 건네줬다.) 씻고 올래? 아니면 밥부터 먹을까? 식사는 준비해 두긴 했는데.
후지세키 세이지:(이곳에 도착한 뒤부터 사고가 시간을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다. 어깨 너머에 걸려있는 달력을 마주한 순간 손이 주춤하는 바람에, 마루에 떨어진 수건을 주워야 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사에키 키요시:...... (무슨 말도 하지 않는다. 떨어지는 수건을 보고도 미동하지 않고 너를 바라보고 있다가 곧 손을 뻗어 네가 들고 있던 수건을 가져온다.) 바람이 부나 보네. 우산 쓴 보람도 없이.
(그 말과 함께 머리를 덮은 수건으로 가볍게 물기를 닦아준다. 얼굴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으나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세이지. 10년이 지났어.
내가 여기서 지낸 것도 벌써 10년이야. (그 말과 함께 시선이 마주친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눈 속에 교차했다.)
그러고 보니 옷은 있어? 오랜만에 내 거 빌려줄까? (언제 그랬냐는 듯, 몇 달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과 같은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후지세키 세이지:... ...거짓말. 문자는 어제 보냈잖아요. 지내다 보니 좋은 곳 같아서, 앞으로 여기서 살겠다고. (하지만 마주한 얼굴이 고스란히 시간을 드러내었기에, 자신이 고집을 부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저도 변했어요? (아니면 저만 그대로예요? 시선은 떼지 않는다. 거울이 없으니 네 눈동자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말리면 돼요. 별로 젖지도 않았고.
사에키 키요시:...... (머리를 털어주던 손이 천천히 멎는다. 내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던 시선이 너를 향한다. 눈이 마주친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몇 달 전, 선생님이 선생님이라서 짜증이 났다던 얼굴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직도 덜 여문 스물. 네 모습은 그대로다.) 우리 세이지 군은 그대로네. (그게 겉모습을 말하는 건지, 아니라면 다른 걸 의미하는 건지는 분명히 하지 않은 채로.)
그럼 저녁부터 같이 먹을까? 피곤했을 텐데. (이미 더 털어낼 물기도 없는데도 한참 머물러 있던 손을 그제야 천천히 거둔다. 입가에는 습관적인 미소만 남아 있었다.)
후지세키 세이지:(둘 다였더라면, 차라리 믿을 수 있지 않았을까? 갑작스러운 기억상실증이라든가, 사고라든가. 아니면 이상 현상으로 인해 세계가 갑자기 미쳤다든가. 상식적인 선이 아니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었으려나. 헛웃음이 나오려다 만 것처럼 입가가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이 모든 게 고의적인 것 같다. 굳이 이런 일이 아니어도 동떨어져 있는데, 이 사람과는 어떻게든 좁혀지지 않을 텐데.)
(손이 떨어지고, 수건이 어깨에 걸리면 다 마른 머리칼을 손으로 대충 털어냈다. 혼자 생각해봤자 의미 없겠지.) ...어떻게 된 일인지 듣고 싶어요.
사에키 키요시:...내가 설명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세이지. (여전히 선선한 얼굴로 다시금 선을 분명히 한다. 다시 한번 목구멍이 뜨끔거렸다. 잊은 적 없는 그날의 밤처럼. 입가가 무거웠다.) 온 김에 구경이라도 하고 가. 가서, 평소처럼 지내면 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아마도 네가 나한테 연락을 받기 전처럼. 그렇게.
가자. 밥부터 먹자. 음식 다 식겠다.
후지세키 세이지:전 들어야겠어요. (답지 않게 말을 끊었다. 어차피 네가 말하지 않겠다면 들을 방법이야 없겠지만... 어쩐지 울컥한 탓이었다.) 그걸 바란다면 얼굴 보이지 말았어야죠. 어제인지, 10년 전인지 문자 보내지 않았으면 됐잖아요. 정말 그런 걸 약속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에키 키요시:왜? (되묻는 말은 단촐했다. 시선을 마주하는 그 순간조차 네 착각도, 잘못 본 것도 아니라는 듯 세월의 흔적은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들으면 뭐가 바뀌는데? 무슨 대단한 사연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 아니, 가령 있다고 해도... 그게 너랑 상관이 있나? (무의식 중에 내뱉은 말은 이전 언젠가, 자신도 모르게 너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와 닮아 있었다. 굳은 얼굴로 애써 입매를 접어 올린다. 벌어졌던 입술은 쉽게 말을 내뱉지 못하다 그냥, 하고 운을 뗀다.)
그냥. ...그냥, 지금은 묻지 말고 있어줘. 부탁할게.
후지세키 세이지:지금 여기 있으니까. (담담한 어조. 질문인지 단정인지 모를 말들에 무언가를 머금고 있는 것처럼 바라볼 뿐이었다. 삼키지도, 뱉지도 않은 채로 그저 막연하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도, 사연도 상관도 없어도요. 어차피 선생님은 정말 제 이유가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저도 묻고 싶은 때가 있었어요. 가끔은 궁금했고, 못 참을 것 같았고... ...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건, ... (잠시 말이 끊긴다.)
이제는 물을 거예요. 싫으면 대답하지 마세요.
사에키 키요시:그러지 않았던 건 왜였는데? (이렇게 똑바르게 마주하는 너와 함께 있을 때마다 절감할 수밖에 없다. 비겁한 어른이다, 나는. 네가 되고 싶지 않다고 했던 나쁘고 모진 어른. 속에서 들끓는 말들을,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삼킨다. 혀 밑에서 술렁이는 말들 대신에. 어쩌면 너를 이해시킬 수 있고, 동정을 살 수도 있을지 모르는 그런 말들 대신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중요하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만약에, 세이지. 네 이유가 중요해서, 그런데 바뀔 건 없어서 그래서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도 않다고 하면.
...그러니까 물어보지 마. 대답 못 해줘, 나는. (인상을 옅게 찡그린 채로 웃으며 고작 그런 대답을 했다.)
(손을 뻗었다. 손목을 쥐었다. 말없이 쥐고만 있다가, 손안에 잡힌 네 손목을 보고 있다가 시선을 떨군 채로 느리게 입을 열었다.) ...같이 있어 줘. 지금은 그거면 돼.
후지세키 세이지:말하기 싫어요. (조금만 생각하면 알만한 것들. 그걸 이렇게 쉽게 물어본다는 점에서 이 사람은 무신경하다. 그야 그때의 나에게 당신의 이유는 중요했으니까. 물음에 연연하지 않는 당신과 달리 그건 내게 상처로 돌아올 거니까. 그건 굳이 꺼내보일 필요 없는 방어기제이자 비겁함이었고, 내지 못한 용기였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런 정도인 거지.
...저는 기대한 적 없어요. (비가 와서 그런지 손목을 감싼 손가락이 차다. 체온이 식어있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음에도.) 오래 있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빗소리에 묻혀 네게는 잘 들리지도 않을, 중얼거림이 끝이었다.)
들릴 듯 말 듯한 그 말에 키요시가 뭐라고 입을 열려던 순간, 부엌에 있던 소티스가 나타납니다.
그녀는 세이지를 붙들고 있는 키요시의 손을 잠시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엽니다.
소티스:얘기 중에 미안해요. 식사 준비가 다 돼서요.
...함께 드시겠어요? (세이지를 보면서 물었다.)
사에키 키요시:...... (손아귀의 힘이 풀린다. 붙잡고 있던 팔목이 헐거워지자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후지세키 세이지:...방해가 안된다면요. (시린 것도 온기였는지, 떨어져나간 손목이 허전해져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세이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소티스가 두 사람을 주방으로 안내합니다.
주방으로 향하자, 테이블 위에는 그녀의 말처럼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메뉴는 로스트비프와 으깬 감자, 버터를 발라 굽고 치즈를 뿌린 옥수수에…… 외에도 여러 음식들이 즐비합니다.
좀처럼 아오모리라는 지역과는 어울리지 않는 식사네요.
소티스:편하신 곳에 앉으세요. (세이지에게 자리를 안내해준 뒤 익숙하게 키요시의 옆자리에 앉았다.)
후지세키 세이지:같이 지내시나 보네요. (집으로 향했던 익숙한 걸음, 어렵지 않게 문을 열던 손이나 주방을 쓰는 것에 편안한 태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길 안내... 감사했어요.
후지세키 세이지:| 기준치: | 65/32/13 |
| 굴림: | 53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세이지는 키요시와 소티스의 손에 같은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소티스:...아뇨, 해야 할 일을 한 거니까요. (접시에 음식을 조금 덜어 세이지의 쪽에 건넸다. 다음으로는 키요시에게. 본인은 마지막이다.) 소티스라고 합니다. 키요시와는... 2년 전에 결혼했어요.
후지세키 세이지:(식기를 들던 손이 잠시 멈칫하나 싶더니, 다시 움직인다.) 결혼하신지 몰랐어요. 졸업한 뒤로는 선생님과 연락한 적 없거든요. ...아. 지금이 자그마치 10년 뒤라면 정말 좀 됐으려나. (비아냥거릴 의도는 없었다.) 시간 빠르네요.
소티스:...... (시간에 대한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묵묵히 식사를 이어나갔다. 다시 입을 연 건 그보다는 조금 뒤였다.) 당신인가 보네요. 식사를 할 때도 단정한 아이가 있었다고 하던데. 가끔 집에도 오가면서 지냈다고요.
후지세키 세이지:(남을 먼저 챙기는 것이 습관인 조용한 여자. 언젠가 들었던 이상형과는 결이 달랐던 것 같다. 어쩌면 무례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 ...가끔 수학을 봐주셨어요. 약한 과목이었어서. (스스로도 꺼내보지 않는 그때의 시간을 남의 입으로 듣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들으셨을 줄 몰랐어요. 부임하신 건 일 년이었거든요. 짧았죠. (고작 일 년이었구나. 말하면서도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소티스:예뻐하는 학생이었다고... 그렇게 들었어요. 키요시가 부임하는 동안 참 예뻐했다고. (일 년인지는 몰랐네요, 덧붙인 뒤에는 식사를 이어갔다.)
사에키 키요시:여기서는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거든. 도쿄하고는 달라서.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중, 뒤늦게야 입을 열었다.) 뭐... (어색한 적막을 메우듯 입버릇처럼 운을 떼었지만, 말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반지가 오늘따라 무거웠다.) ...사실이기도 하고.
식사가 마무리될 때쯤, 소티스는 오래간만에 만난 지인끼리 천천히 해후를 즐기라고 말한 뒤 먼저 방으로 들어가 쉬겠다고 전합니다.
올라가는 김에 세이지가 쓸 방을 정리해둔다고도 하네요.
후지세키 세이지:...... (조용히 식기를 내려놓았다.) 결혼 축하드려요. 늦었지만.
사에키 키요시:(네가 알던 것에 비해 얼마 비우지 못한 식사였다. 접시에는 여전히 음식물들이 남아 있었지만, 더 먹을 생각은 없는지 진작 식기를 내려둔 뒤였다. 소티스가 부엌을 나서기 전, 건네준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글쎄. (접힌 입매는 다분히 습관적이었다.) 축하 받을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다지 축하 받고 싶지도 않았고.
후지세키 세이지:...계시는 곳에서 말하는 게 나을 뻔했네요. (축하를 건네고도 어딘가 찝찝함이 남은 것 같았다. 비우지 못한 그릇을 넌지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다. 나눌 해후라고 해봤자 많지 않았다.) 그래도 받으세요.
하고싶어 하셨으니까. 결혼.
사에키 키요시:역시 하나도 못 잊었구나, 세이지 너도. (그리고 자신 역시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예뻐하는 학생의 이야기라며 이따금 너의 얘기를 했을 때처럼. 저 사람은 너의 이름까지는 몰랐다.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너와 있었던 일들은 가끔씩 했다. 이유는......)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건 결혼이 아니었어. 결혼 같은 거, 언제부턴가는 생각도 한 적 없었어. 그냥, 그때는...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다물렸던 입술 사이로 곧 포기하듯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가 있는 게 좋았던 것 같아.
후지세키 세이지:잊을 거예요. ...10년이면. (그 말대로다. 지난 1년을 잊는 데 10년까지 필요할 거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시간을 시간으로 덮는 것은 가장 간단한 일이어야 하니까. 그래서 부러 네 손의 반지에 시선을 붙였다. 이제는 정말 당신의 이유를 중요하게 여기면 안 된다. 누군가의 응답에도 중심을 잃지 않을 연습이 필요했다.) 그래서 못 잊었어요? 선생님은.
(돌이켜보면 그렇게 좋았던 기억도 아닌 것 같은데. 같은 시간이라고 해서 같은 느낌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 진부한 사실이 이제와서야 조금 우스울 뿐이지.) ...저는 불편했어요.
사에키 키요시:정말 나쁜 어른은 되지 않을 생각인가 보네. (네가 말을 마치고도 잠시 침묵한 끝에 내뱉는 말은 그거였다.) 잊어야지. 10년이면 그래야겠지. ...그런데 나는 세이지 군도 알다시피 그렇게 좋은 어른은 못 돼서.
(김이 오르는 찻잔을 보고 있던 시선이 너에게로 향했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얼굴. 16년의 터울을 두고도 10년이나 더 전에 두고 온 앳된 얼굴이 보이면 씁쓸한 웃음이 접혔다.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다. 편안히 올려두었던 왼손을 곧 테이블 아래로 감추었다.) 그래, 못 잊었어. 나는. (그리고 너 역시 잊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고, 그제야 생각한다. 때문에 불편했다는 너의 말에는 작게 웃음이 샜다. 오늘 여러 번 서운하게 하네, 하는 실없는 말도 덧붙였다.)
...이 정도면 방 정리도 끝났을 것 같고, 올라갈래? 내일도 있으니까, 시간은.
후지세키 세이지:평범한 어른이 되려고요. (어차피 여기 남는 것은 내가 아니고, 두고 간다고 해서 당신을 떠나는 것도 내가 아닌 모양새가 됐으니. 애나 어른이나 자신은 이대로 어중간할 모양이다. 손이 시야에서 내려가면 그대로 식탁을 짚고 일어났다.) 네. 오늘은요.
있잖아요. ... ...제가 여기 있어도 안 불편해요? (그 집에 들어설 때면 망설였던 것 같다. 당신은 별로 개의치 않았던 것 같지만, 이제는 다르지.)
사에키 키요시:세이지, 말했지. 나는 그다지 좋은 어른은 못 된다고. (일어서는 너를 보고도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뒤늦게 네 얼굴을 바라본다.) ...넌 내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면 놀랄걸.
...그러니까 며칠만 더 있다가 가.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집이라는 장소에서 제가 다시금 눈치를 보게 해야 한다는 것. 그게 가장 마음에 걸릴 따름이었다.) 조금만 더 얼굴 보여줘.
후지세키 세이지:...아니면 됐어요. 뒷정리 도울 필요 없으면 저 먼저 올라갈게요. 그리고,
... ...선생님한테만 묻는 거 아니에요. 불편하다 하시면 알려줘요.
세이지의 말에 키요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알아들었을 텐데도, 여전히 대답을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는 건 여전하네요.
2층으로 향하면 세이지를 위해 마련된 방이 있습니다.
언제 가져다 둔 건지, 내려두었던 짐들도 한편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네요.
싱글 베드 하나와 그 옆에 바로 붙어있는 협탁, 벽장과 창문으로 구성된 손님용 방입니다.
그간 사람이 머물지 않았는지 싸늘한 냉기가 그대로 느껴지네요.
후지세키 세이지:...(오랫동안 비어있던 것 같은 방이지만 줄곧 관리를 해와서 그런지 깔끔한 느낌이었다. 가져온 짐이라고는 배낭 하나여서 정리할 것도 없었다. 어느새 다 마른 겉옷은 벗어서 헤드에 걸쳐두고 잘 준비를 한다.)
세이지는 고단했던 하루를 마치고 잘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마을도 고요해집니다.
그 어둠을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번화한 마을이 아니니, 밤이 되면 어두운 것은 당연하지만……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도 달은 보이지 않고, 가로등의 불빛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 기준치: | 44/22/8 |
| 굴림: | 9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이상함을 감지한 세이지는 밖에 나가 이곳을 확인하거나, 혹은 이대로 집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바람도 쐴 겸 잠깐 밖에 나가 확인하고 온다.)
하늘을 바라보거나 땅을 봐도 사위엔 어둠뿐입니다.
보통 이렇게 어둡다면, 별은 잘 보이는 게 아니던가요?
밖으로 발을 내딛으면 알 수 없는 무한한 공간을 마구 걸어가는 기분이 듭니다.
걷다 불현듯, 길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 갑자기 머리맡에 가로등이 켜집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전등을 들고 있는 소티스가 당신에게 천천히 걸어오고 있습니다.
소티스:후지세키 씨. (표정이 다양하지 않아 담담해 보였으나 짐짓 당황한 기색이었다.) ...놀랐어요, 갑자기 집에서 없어지셔서요.
후지세키 세이지:...아. 죄송해요, 잠깐 바람이나 쐬려고 나왔는데... ... 이렇게 깜깜할 줄 몰랐어요.
핸드폰이라도 가지고 나올 걸 그랬네요.
소티스:아뇨, 이건... (뭔가를 말하려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돌아가죠, 시간이 늦었어요. 키요시도 걱정하고 있어요.
후지세키 세이지:...? 네, 가요. (순순히 걸음을 돌렸다.)
돌아가는 길에 주변을 보면, 마을은 그냥 조금 어두운 밤의 마을입니다.
하늘도 별이 적지만 없는것은 아니며, 산 뒤에 숨어있던 달도 보이네요.
집으로 돌아오면 온 건물에 불이 켜져있으며, 키요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에키 키요시:...나쁜 어린이는 졸업한 줄 알았는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선선한 말투였다.) 바람이라도 쐬러 갔던 거야?
후지세키 세이지:나쁘지도 않고 애도 아니니까 졸업했죠. (물음에 평범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네, 뭐. 엄청 깜깜하길래 나가봤는데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던데요. 이 동네, 가로등은 원래 잘 안 켜져요?
사에키 키요시:글쎄, 원래 그러진 않는데... 잠깐 문제가 있었나 봐. (아리송한 대답과 함께 웃더니 가만히 너를 시선에 담았다.) 얼른 올라가서 쉬어. 피곤하겠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내일은 좀 돌아다녀 봐야지.
후지세키 세이지:괜히 소티스 씨만 귀찮게 했네요. 딱히 관광같은 걸 하러 온 건 아닌데... (말끝을 흐리다 그럼 주무세요, 두 사람에게 짧게 덧붙이고는 계단을 올라간다.)
잘 자라는 두 사람의 인사를 하고 세이지는 다시 방으로 돌아옵니다.
불편한 잠자리에 몸을 눕히면 어느새 새벽이 저물어갑니다.
간밤에 푹 잠들지 못했다면 느지막이 일어나도 상관 없을 것 같아요.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키요시만이 있고, 소티스가 보이지 않습니다.
키요시에 집에 머무를 때 자주 먹었던 음식들입니다.
그렇게 말하던 10년이 무색하게도, 여전히요.
사에키 키요시:일어났어? 조금 더 자도 되는데. (둘만 남은 집은 고요했다.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두며 말했다.)
후지세키 세이지:... ...아내분은요? (적막한 집을 눈으로 훑다 테이블 가까이 다가갔다.) 아, 일하러 가셨나.
사에키 키요시:아.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 모양인지 네 말에 잠시 멈칫했다가 곧 웃음을 접었다.) ...평일에는 마을에 있는 진료소에서 일하고 있어. 거기 있을 거야, 지금은.
국물 없으면 밥 못 먹었지? 우리 세이지 군. (그러고는 네 맞은편 자리에 앉으면 말했다.)
후지세키 세이지:(2년이나 같이 살았으면서 새삼. 부르는 호칭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이쪽이나 겪을 법한 양상이다.) ...의사? 간호사? (짤막한 물음을 던지며 눈 앞에 차려진 메뉴보다도, 그 앞에 자리하고 앉은 인간을 멀뚱히 바라본다.) ...딱히 그런 건 아니거든요.
......백수예요? 선생님.
사에키 키요시:...의사.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티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꺼려지는 듯 말은 짧았고, 덧붙이는 설명도 없었다. 멀뚱히 닿는 시선에 가만히 너를 마주 바라보다가, 마지막 질문에 결국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덕분에 가끔 진료소 일만 돕고 쉬고 있어.
...세이지는? 어떻게 지냈어? 대학교는.
후지세키 세이지:(원래도 주변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 본인의 이야기는 더더욱 그랬고. 그러므로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돈 잘 벌고 요절하는 남편은요? (농담처럼 덧붙였지만 딱히 그렇게 들렸을지는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제게 돌아오는 화제에 익숙하게 젓가락을 쥐었다.) 교육학과요. 국어국문 위주로... 잘 지냈어요, 저도.
사에키 키요시:...그러게. 그런 남편은 어디로 갔나. (이상하게도 전에는 기억하지 못할 법 했던 것들도 이곳에 머문 뒤로는 하나둘씩 스쳐서 떠오를 때가 있었다. 네가 건넨 농담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로 젓가락을 집으려던 중, 학과 이름을 듣고 잠시 얼굴이 굳는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에 지나지 않았고, 곧 웃음이 접혔다.) 선생님이 된 세이지라니. 보고 싶네. 한 번은.
오늘은 밥 먹으면 어디로 갈 거야? 마을, 둘러볼 생각이야?
후지세키 세이지:(기억하는 건지,하지 못하는 건지 모호한 반응이었다. 흘끔 보더니) 선생님 할 때... ...어땠어요? 그래도 선배님이신데. (어제 저녁부터 음식의 맛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입맛이 없는 건지, 혀가 굳은 건지.)
내내 재미없는 아저씨랑 있긴 좀 그렇죠. 추천해줄 만한 곳이라도 있으면 알려줘요. 그렇게 살기 좋은 곳이라니까.
사에키 키요시:어땠더라... 이상하게, 그때 기억은 대부분 학교보다는 다른 사람 기억으로 맺어지는 때가 많아서. (그런 말이나 하고는 입매를 접어 웃었다. 시선을 흘려둔 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 ...솔직히 교육에 커다란 야심이나 욕심 같은 건 없었어. 일 년, 그것만 끝내고 문부성으로 돌아가면 이후의 길이야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그걸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지.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주는 것도, 영향을 받는 것도 그다지 달갑지 않았거든. 나는. 세이지한테는 이미 들켰으려나. (반쯤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웃음에는 옅은 한숨이 묻어났다. 거기까지 말한 뒤에는 한동안은 너를 들여다봤다. 오래 보지 못했던 사람, 그리고 오래 보지 못할 사람을 눈에 담듯이 한참이나.)
...같이 있을까? 어디도 가지 말고, 오늘은 둘이서.
(곧 웃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농담이야, 덧붙였다.) ...어딜 가도 도쿄보다는 한적해서 좋지만, 호수 근처는 가지 마. 위험할 거야. 비가 많이 와서.
후지세키 세이지:정말 도움 하나도 안 되는 선배님이시네. (차라리 웃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지만 조금도 그러진 못했을 것이다.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어서, 또 애매한 표정이나 지었겠지.) 선생님은 반면교사예요. 제 안에서는 가장 나쁜 예시... 정도려나.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들켰다니, 그보다는 훨씬 노골적이었으니까. 덕분에 이해하기 쉬웠고.) ... ...그런데도, 여기 계시는 건 의외네요. (그렇게 여기가 마음에 들었어요? 풀이하자면 이런 뜻이었다. 말 사이 뜸이 길어지자 조용히 시선을 들었다.)
...여전하시네요. 질 나쁜 농담을 진심처럼 하시는 건.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한 마디로 일축하는 것까지. 당신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것으로 무마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말 뿐이고, 그럴 때면 이렇게 눈이 마주쳤었다. ...보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사에키 키요시:만약에 말이야. 내가 여기 있어서 있고 싶은 게 아니라고 하면 뭐라고 할래? (시선은 여전히 너를 향해 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엎지르듯이 질문이 새어 나왔다.) ...만약에 내가 질 나쁜 농담으로 더 나쁜 진심을 숨기고 있는 거라면.
학교에서 보냈던 일 년은 늘 네 생각으로 맺어졌다면, 세이지. 그런데도 내가 아무것도 변할 수 없어서 네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면, 넌 믿을래?
...아니면 지금, 아무런 상관도 없는 채로 살아갈 수 있을 때 도망칠래. (묻는 것은 너였고 답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었으나 마치 선택권은 네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리에 두고 온 것은 너였고, 너를 두고 결혼을 한 사람은 자신인데도 남겨진 게 자신인 것처럼 네게 물었다.)
후지세키 세이지:겁쟁이. (힘없이 툭 뱉었다. 사고를 거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말이다.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다. 심장은 멀쩡하게 뛰고 있는 것 같은데도 도리어 핏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숨이 목구멍에 걸린 채 잘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이라는 말로는 안 돼요. 그건 어떤 의미도 되지 않으니까. 그 말 뒤에 오는 게 비겁한 진심이건, 떳떳한 거짓이건 너무 쉽게 없앨 수 있으니까. 전 그거에 너무 많이 속았어요. ...설마 아니라고 하진 않겠죠. 그러니까, ... ...말해봐요.
……저희는 정말 아무 상관없어요? (그 말을 하면서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모르기 때문인가. 나는 당신에게 선 밖의 사람인가, 선 안의 사람인가. 늘 궁금했다. 가장 기저에 있지만 묻지 못했고, 물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렇다면 끌어들이지 마세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 ...직접 말해요. 만약이라는 거, 변명같은 거 전부 떼고.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사에키 키요시:(겁쟁이라는 말에 바람 새듯 짧은 헛웃음이 터졌다. 정곡이었다. 겁쟁이였다, 결국에는. 도쿄에서는 너 하나를 붙잡겠다고 가족과 직장, 그간 살아왔던 양지의 궤도를 등질 수 없었고, 지금 같은 순간이 되어서도 너에게 무엇 하나 털어놓지를 못하는 겁쟁이다. 비겁자다. 그런 주제에 너를 말없이 돌려보낼 수 없는 비겁자였다.)
...상관있어. (그리고 이것이 가장 저열하고 찌꺼분한 것이 나의 본심이다. 의미를 가지게 될까 봐, 더는 잘라내고 도망칠 수 없는 곳까지 딛게 될까 봐 너를 상처 주고 선 밖으로 밀어내게 했던 나의 본심이다.) 정확히는 상관없던 적이 없어.
계속 생각했어. 만나고 싶었지.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좋아한다는 연하고 부드러운 문장을 뱉기엔 우리가 나눈 것은 상처밖에 없었으므로. 허탈한 웃음이 접힌다.) ...네게 충분히 흔들렸어, 나는.
(네 곧은 등을 생각했다. 어느 학과에 가게 됐는지, 나쁜 어른이 되지 않겠다던 너는 어떤 어른으로 자라고 싶은지, 너를 억누르던 가족과 집이라는 장소에서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는지. 너는 조금 더 너를 챙길 수 있게 되었는지. 나와 있었던 일들은 네게 어떻게 남아 있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했었다. 이곳에서 10년을 지내며. 지난 1년을 잊는 데 10년까지 필요해서는 안 됐다. 시간이 시간을 덮는 건 가장 간단한 일이어야 하니까. 그런데도.) ...왜 그랬을까. 마지막 미련이어서 그랬나. 내가 너무 상처를 많이 줘서 그랬나.
세이지. (네가 정말로 여기까지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오더라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 안일함으로 그 순간,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핸드폰 화면에 뜬 네 생일 알람을 핑계로 네게 연락을 했다.) ...며칠 뒤면 난 아마 죽게 될 거야. (가장 담백한 목소리로 말한다. 조금의 거짓이나 장난기도 없는 음성이나, 얼굴은 습관적으로 웃고 있었다.) 이미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해봤어. 그러니까... 이제는 아무것도 묻지 말고, 조금만 더 있어줘.
후지세키 세이지: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시절의 후지세키 세이지의 삶은 모순이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해 혼자 붕 떠있는 주제에, 어디도 갈 수 없었다. 완전히 버려진 것이 아니었으니 완전히 엇나가지는 못했다. 애초에 그럴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고, 그 점이 자신도 못내 억울했던 것 같다. 학교가 끝나면 교문 밖을 한참 떠돌았지만 끝에는 꼬박꼬박 집으로 들어갔다. 찾는 사람이 없어도 그랬다. 그건 관성 같은 거였다.)
(사에키 키요시는 저와는 다르게 완벽히 궤도 안의 인간이었다. 구심력 같은 인간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자신은 본래 접착력이 약했으니 떨어져 나가는 것이 마땅했으나, 그 힘 때문에 조금이나마 양지에 가깝게 붙어 있었다. 그건 정상적인 것은 아니어서, 함께 하는 내도록 비냄새를 닮은 것이 폐에 오래 들러붙어 숨 쉬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도 덕분에 그럭저럭 그 시간을 버텨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은 역시 고여 있는 인간이라, 떨어져 나간 뒤에도 여전히… …) 상관없을 수 없다고. …
... ...
그런 말 해도, … … (당신과 함께 있으면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을 실감한다. 묻고 싶은지, 묻고 싶지 않은지. 보고 싶은지, 다시는 보기 싫은지. 가까워지고 싶은지… …멀어지고 싶은지. 해소되지 못한 막막한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정말 화가 나는 것은, 그가 가장 가감 없는 진심을 말할 때에도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거였다. 세이지, 네가 모르는 건 나도 몰라. 덤덤한 그 목소리에 나는 아무 답도 해줄 수 없는데, 그야 내가 가장 모르겠는 건 여전히 당신이니까.) 그럼 저는요? (가장 믿고 싶은 것은 믿을 수 없고, 가장 믿을 수 없는 사실만이 남아서, 남은 시간이라고는… …고작 며칠이었다.)
저는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죽는 거 지켜나 봐요? … … 아무 상관 없는 사람처럼?
사에키 키요시:(이미 한참 전에 목적을 잃은 음식들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을 돌아 네가 앉은 자리로 다가갔다. 다가가서 몸을 숙이고 앉았다.
나 좀 봐, 응? 말하면서 가만히 네 손을 쥐었다.) ...이래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고 그냥 이틀 정도 네 시간을 받으면, 그거면 되겠다고 생각했던 건데.
(간절함이나 애처로움, 눈물겨움 같은 절박한 단어들은 좀처럼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네 손을 감싸 쥔 엄지손가락이 네 살갗을 자꾸만 쓸어 만졌다. 제대로 웃고는 있는지, 목소리가 볼품없지는 않은지 그런 생각이 재차 하게 됐다. 네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다리를 굽히고 앉은 탓에 의자에 앉은 너를 치어다보며 입만 벙긋거렸다.) 도망칠래?
(삶은 네게 서늘했다. 비참하다거나 고통스럽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언제고 너를 뜨겁도록 끌어안아 주거나 있는 힘껏 반겨주지 않았다. 담담한 너는 너도 모르는 사이에 수없이 베여야 했다. 괜찮다, 괜찮다, 위로해 줄 사람도 없이 너는 몸을 웅크린 채 오래 한 점에 고인 채로 살아가야 했다.) 지금이라면 아직 그럴 수 있는데.
(그런 쓸쓸함을 등에 진 채 살아왔던 네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것이다. 삶의 종장, 언제든 비겁하고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마지막 한 가지란.) ...우리 정말로 상관 없어질까? 이제는.
후지세키 세이지:(바닥에 의자가 끌리는 소리, 다가오는 몇 걸음을 들었다. 뒤이어 서늘한 손이 제 손을 감싸 쥐는데도 고개는 들 수 없었다. 낮춘 몸이 언뜻언뜻 보였다. 말을 건네는 목소리만큼은 그때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이런 어조, 이런 어투는 낯설기 짝이 없다. 열을 식히는 온도만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간곡한 손길은 모른다.) … … (정말 싫다. 죽는 것이 누구인지.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누구 처지를 걱정하는 건지. 왜 정말 죽을 사람처럼 답지 않은 다정을 보여주는 건지. 고통과 비슷한 기분을 참을 때면 입안 살을 옅게 씹었다.) ... ...그러지 마요.
(이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도망을 가르치는 점이 당신다워서 눈물이 났다. 좋은 걸 일러준 적은 하나도 없고, 나쁘고, 약았고, 비겁한 어른이 되는 것. 그런 길을 가라고… … 꼭 당신처럼. 가만 고개를 젓다가 고개를 든다. 그렇게 한다면 평범한 어른이고, 나쁜 어른이고. 상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전부 끝일 테니까.) 생일, 생일 때까지만.
(그래. 나는 언제나 끝이 두려웠던 것 같다. 이렇게 모든 걸 남기고 가는, 일방적이고, 갑작스러운 끝이.)
어차피 그때, 전부 끝내려고 했으니까. 그때까지만…… (지금까지의 시간을 네게서 벗어나기 위해 쓴 것에 반해, 이제는 도망가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한다 해도.)
사에키 키요시:(사람으로서, 스스로의 모습을 잃지 않은 채 청결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긍지 높은 삶은 아니었으나 긍지를 모두 잃지 않은 삶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게 무용했으므로, 사색 정도가 내가 끼칠 수 있는 유일한 해였으므로. 그러나 네가 기어이 찾아왔다. 봄의 밤, 다시금 비 냄새를 품은 채 네가. 그러니 이제는 그것도 되지 못하겠다, 생각했다.)
...아프겠다. (입안 살을 씹는 모습이 보였다. 예전에는 보아도 몰랐던 것들이 이제는 마음에 걸렸다. 손 하나를 감싸 뺨을 감쌌다. 엄지로 뺨을 문지르며 부드럽게 풀어줬다. 견디지 말라고, 견디면서 다치게 하지 말라고 바라면서.)
그래, 그때까지만. (젖은 뺨이 보이면 굽히고 있던 몸을 들었다. 입술은 곧장 네 눈가에 닿는다. 지그시 누른 채로 어느새 떨리고 있던 호흡을 옅게 내쉬었다. 울지 마.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눈을 감는다.) 울지 마. 미안해.
미안해. (눈을 마주치기 위해 입술을 뗐다. 찰나라도 좋으니 네가 담기면, 보람도 없이 곧 고개를 틀며 다시 입술을 맞춘다. 조금의 힘도 싣지 않고, 네 입을 억지로 벌리려고 하지도 않은 채 그저 조용히 두 입술을 맞붙인 채로 잠시 눈을 감았다. 4월의 스무 번째 날. 아니, 필경 그보다도 빠를 완전한 작별을 예감하면서.)
그 뒤로 오전 시간 동안 함께 집에 머물렀던 두 사람은, 키요시의 제안으로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기로 합니다.
내렸던 비 덕분인지 공기가 맑아 멀리까지 잘 보입니다.
마을의 중앙에 광장과 진료소가 있고,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있습니다.
통행이 좋은 곳에 음식점이 있으며 강에서 이어진 호수 하나가 외딴곳에 위치합니다.
차를 타고 나가야 슈퍼나 대형 마트가 존재하는 모양이네요.
사에키 키요시:마을에서 둘러볼 건 이 정도고, 어디부터 가보고 싶어? (집에서 나선 뒤로도 시선은 네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묻는 중에도 마찬가지다.)
후지세키 세이지:...우선 좀 걸을까요. (애매하게 한 걸음 뒤에 서있다, 광장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사에키 키요시:그럴까? (자신을 스쳐 걸어가는 네가 보이면 조용히 팔을 뻗어 네 손을 쥐었다. 시선이 마주치면 소리 없이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광장 쪽으로 향했다.)
담배를 피우거나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봄옷을 입은 사람들은 근심 걱정 없이 편해 보이네요.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이 한적한 풍경이 이어집니다.
사에키 키요시:작은 마을이거든. 집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이쪽에서 햇볕을 쬐거나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네, 대부분은. (도쿄에 비하면 별거 없지? 하고 물으며 시선을 맞췄다.)
후지세키 세이지:...도쿄도 비슷한데요 뭐. 좀 더 공기 안 좋고, 사람 많고... 여기가 나을지도요. (어쩐지 네 얼굴을 잘 보지 못하겠다. 부러 시선을 멀리 두었다.) 저기 비둘기... 엄청 살쪘어요.
사에키 키요시:(담배라도 피울까 싶어 내내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려다가 어쩐지 영 시선을 마주쳐주지 않는 모습이 보이면 실없이 웃음이 새, 차라리 조금 더 힘을 실어 잡았다. 네 귓가에 가깝게 고개를 숙이고는 작게 물었다.) 세이지 군, 혹시 지금 쑥스러워하는 중이야?
후지세키 세이지:(순식간에 좁아진 거리에 움찔 고개를 물렸다가 조금 인상을 쓴다. 일부러 이러는 거겠지.) 그게 아니고... 어색해하는 중이거든요. (아 다르고 어 다른 거다.)
사에키 키요시:(좁힌 거리를 물리지 않고 대신에 고개를 조금 기울여 네 얼굴을 살폈다. 장난기가 무색하게 곧 시선이 한참 닿는다. 역시 생각보다는 실제로 보는 게 좋네, 속으로만 생각한다.) ...그래도 얼굴은 보여줘. 꽤 보고 싶었거든.
(작게 웃음소리가 샜다. 그제야 고개를 뒤로 물렸다.) 더 보고 싶은 곳 있어? 도서관이라도 가볼래? 우리 세이지 군, 책 좋아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
후지세키 세이지:... ... (뺨에 따갑게 닿는 시선에 눈동자만 굴려 옆얼굴을 바라본다.) 그랬으면서 왜, ...한 번도 연락 안 했어요? (제게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지만, 네게는 아니었을 텐데.)
(멋쩍게 뒷목을 주무르다 앞쪽에 보이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랬죠. 그래서 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는데.
사에키 키요시:...그야 하고 싶었지. 몇 번이나. (이유를 설명하기보다는 그렇게 말했다. 조용히 입을 다문 채로 웃었다. 나조차 믿지 못하는 너는 이 모든 상황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얼마만큼의 비현실성을 너는 받아들이고 있을까.) 하고 싶었어.
(진심을 전할 때는 언제나 그랬듯 한 번 더 덧붙여 말한 뒤에 너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이따금 자신을 알아보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들리면 평소처럼 가볍게 묵례하며 지나갔다.) 아르바이트? 졸업하고 나서? 어땠어.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고?
후지세키 세이지:(선별적인 대답에 큰 대꾸는 하지 않은 채 말없이 걸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했었다. 어쩌면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스치듯 짧게 들었다.)
그냥, 어차피 일할 거 책 냄새 나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서요. 같이 강의 듣는 애들만 몇 명... 아르바이트 선배들 하고요. ......친구라니, 무슨 조카 안부 물어요? (성실하게 대답하고 나서야 뭔가 걸리는 듯 눈을 흘긴다...)
푸근한 인상의 사서 한명이 조용히 카운터를 보고 있습니다.
내부는 넓지 않지만 책을 읽을 만한 책상도 구비되어 있고, 책 종류도 다양해보이네요.
사에키 키요시:그냥. 이제는 좀 많았으면 좋겠어서. 혼자 아프지도 말고, 답답하고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불러내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고민이 생기면 물어보기도 하고. 뭐, 그런. (결국 외롭지 않길 바란다는 뜻이었다.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하다가 도서관에 들어서기 전 너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난 조카랑 뽀뽀 안 하는데.
보고 싶은 책 있는지 둘러볼래? 여기서 기다릴게. (책 냄새가 나는 곳. 여기서까지 괴롭힐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몇 없는 테이블 중 하나에 앉는다.)
후지세키 세이지:나참, 그렇게 걱정돼서 눈은 어떻게 감으시게요. (다정한 말에도 괜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가장 외롭게 만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에 어딘가 괘씸한 기분마저 들어서였다.) ...아, 아저씨 같아. (마지막에 말에 중얼거리다 네가 걸음을 멈추면 잠시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가, 오늘 네가 한 대도 태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그럼 조금만 보고 나올게요. (적당히 안으로 들어서, 책장 사이를 훑었다. 마을 도서관치고 책이 생각보다 많네...)
후지세키 세이지:| 기준치: | 70/35/14 |
| 굴림: | 38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마을 사람들이 자주 찾는 것으로 보이는 책이 있습니다.
한 권을 집어들어 열어보면 자주 펼쳐 본 자국이 남은 페이지를 발견합니다.
후지세키 세이지:(몇몇 책을 더 뽑아 펼쳤다가 꽂아 넣기를 반복한다. 그중 라벨 순서가 잘못된 것을 습관적으로 정렬하기도 했다. 어차피 대여증도 없고... 책을 읽을 정신같은 건 더더욱 없으니까. 적당히 구경을 한 뒤 밖으로 나왔다.)
사에키 키요시:어떠셨어요, 책 구경은. (멀어진 뒤에도 내내 서고를, 책장과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는 너를 구경하고 있던 모양인지 금세 시선이 마주쳤다. 턱을 괸 채 장난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드는 게 없어?
후지세키 세이지:...됐어요. 책은 언제든 읽을 수 있으니까. (생각해보니 당신에게 대출증이 있겠지 싶다. 책보다는 자료를 읽는 것을 더 많이 봤지만.) ... ...도서관 자주 와요?
사에키 키요시:그다지. 예전에는 꽤 자주 왔던 것 같은데, 나도 오랜만이야. (간격이 가까워지면 께느른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조금 장난기가 일었다. 자연스럽게 잡기보다는 일부러 손바닥을 펼쳐 네 앞에 내밀었다. 잡으라는 듯이.) 또 어딜 가볼까. 볼만한 곳이라고는 호수가 전부인데, 비 때문에 영 예쁘진 못할 것 같은데.
후지세키 세이지:... ... (앞에 내밀어진 손을 보고 입을 몇 번 달싹이다 꾹 다물었다. 내민 손을 어설프게 잡고 막 일어난 상대를 이끌듯이 조금 힘을 주었다.) 호수로 가요. 언제 또 비가 내릴지도 모르고.
사에키 키요시:(체온이 닿자 입매가 조금 더 접혔다. 헐겁게 잡힌 손에 힘을 싣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분이 들어서 이번에는 별다른 말 없이 호수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밤에 내린 비 때문인지 호수는 전체적으로 녹색 빛이 도는 게, 그다지 청결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별다른 안내 팻말이 세워져 있지도 않은 걸 보면, 이곳까지 걸음하는 마을 사람들은 거의 없는 것 같네요.
후지세키 세이지:This message has been hidden.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29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세이지는 호수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다는 깨닫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 (난데없는 빛에 시선을 고정한다. 뭔가 장신구라도 빠진건가.)
사에키 키요시:세이지. (호수 안을 들여다보는 네 옆얼굴을 보다가 공연히 이름을 불렀다.)
사에키 키요시:(시선이 마주치면 별다른 예고도 없이 입을 맞췄다.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그냥, 거기만 보고 있길래 나도 좀 보라고.
더 보고 싶은 곳 있어? 조금 더 걷다가 들어갈까?
후지세키 세이지:아, (예기치 못하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에 뒷목까지 뻣뻣하게 굳었다. 금세 흩어지는 웃음소리에 겨우 눈을 끔뻑이다가) ...아니, ...예고 좀... ... (힐난 아닌 힐난을 꺼내놓다가 다시금 호수를 흘끔 돌아본다.) 아뇨. ...산책은 많이 했으니까.
저기, ...소티스 씨는, (말끝을 조금 흐렸다.) 알고 있어요?
사에키 키요시:그 표정이 보고 싶어서 하는 건데, 예고를 할 수는 없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보다가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바람결에 흐트러진 네 머리를 만져줬다. 좀처럼 떠올리지 못했던 이름이 들리면 곧 표정이 점차로 차분해졌다.)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어.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보이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말을 멈추었다.) 걱정하지 마. 세이지가 생각하는 일은 없을 거니까.
후지세키 세이지:(한번 이름을 입 밖으로 내니 어쩐지 참을 수 없이 가슴께가 묵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가늘고 벼린 것이 목에 걸린 듯한 날카로운 감각. 토해내고 싶지만 한편으로 알고 싶지 않다. 어디까지 알까. 그 사람은, 알고 있을까. 며칠 후면 그가 더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까지.) ...돌아가요.
사에키 키요시:...그래야지. (손을 잡는 것 말고는 자신이 더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걱정하고 어떤 감정에 시달리고 있을지를 짐작하면서도 차마 함부로 말을 얹을 수가 없었다. 그저 손을 놓지 않는다.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말없이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키요시와 세이지가 마을을 둘러보고 돌아오자, 먼저 돌아온 소티스가 저녁을 만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이지에게 마을은 어땠느냐고 단정한 얼굴로 물어오네요.
저녁 메뉴는 고기를 생강에 절여 구운 쇼가야키입니다.
소티스:두 사람이 같이 다녀온 모양이네요. 마침 음식도 다 된 참이니, 편하신 곳에 앉아서 드세요. (마지막 접시를 내려놓은 뒤에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았다.)
마을은 좀 어떠셨어요?
후지세키 세이지:... (시선을 앞의 접시에 둔 채 한참을 말이 없었다. 뒤늦게 네가 무언가 질문한 것을 깨닫고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한적하고 좋은 마을이던데요. 소티스 씨는... 진료소에서 일한다고 들었어요.
소티스:이 사람한테 들으신 모양이네요. 네, 보통 오후 3시까지는 그쪽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어차피 사람이 많지 않은 동네라서요. 위급할 일도 거의 없고요. (세이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분한 어조로 대답하며 식사를 이어갔다.) 하루만에 돌아볼 정도로 작은 마을이죠. 키요시가 잘 안내해주던가요?
후지세키 세이지:위급... (말끝이 흐려졌다.) ...아직 다 돌아보진 못했지만요. (음식을 씹는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그냥 산책 정도 한 게 다여서. 추천해주실 곳이 있다면 가볼게요.
소티스:글쎄요, 추천이라고 해도... 아마 키요시가 전부 데려가지 않았을까 싶네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다가 이내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느리게 덧붙였다.) 호수 쪽만 가지 않으시면 될 것 같네요. 그다지 깨끗한 곳은 아니거든요.
후지세키 세이지:(호수... 다녀왔는데. 눈치를 슬쩍 봤다...)
사에키 키요시:이미 다녀왔어. 비가 와서 그런지 평소보다 탁해 보였지만. (말한 뒤 설핏 스쳤던 시선은 우습게도 소티스가 아닌 너의 쪽이었다.)
호수에 다녀왔다는 말에 어째서인지 평소와는 다른 반응을 보이던 소티스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던 때,
일어나서 밖을 나가보자 마을 사람 한 명이 상처입은 사람을 부축하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 “마을 어귀에서 알 수 없는 산짐승에게 공격받아서 다쳤어! 소티스 씨, 어떻게 지금 도와줄 수 없는가?”
그 말에 소티스와 키요시는 서로 마주보고 잠깐 표정을 굳힙니다.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지만, 나중으로 한 뒤 소티스는 주민 두 사람을 데리고 자신의 진료소로 향합니다.
여기서 두 사람은 식사를 계속할 수도 있고, 소티스를 따라 진료소로 가볼 수도 있습니다.
사에키 키요시:...... (굳은 표정으로 소티스가 향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목소리를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시선은 한 발자국 늦게 뒤따랐다.) 괜찮... 을 거야. 뭐, 이런 일은 나보다는 잘 해결할 테니.
...우선은 밥부터 먹을까? 신경 쓰여서 내내 먹지도 못한 것 같으니. (진작 알아차렸다는 듯 덧붙여 말하고는 열어뒀던 현관문을 그대로 닫았다. 아내가 다급하게 나갔다고 하기엔 서늘한 태도였다.)
후지세키 세이지:...저거, 닦아야 하지 않아요? (현관에 남은 혈흔이 신경쓰이는 듯 옆에서 곁눈질하고는) 산짐승...같은 것도 가끔 내려오나 봐요.
사에키 키요시:뭐, 근처가 숲이니까. 보통은 어두워지면 돌아다니질 않으니 이런 일은 거의 없는 편이긴 한데... 솔직히 말하면 나도 처음 보는 상황이라.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현관에 남은 핏자국을 바라보다가, 곧 기색을 지우듯 평소 같은 얼굴로 웃으며 너에게 말했다.) 내가 할게, 먼저 들어가 있어.
후지세키 세이지:... ...잘 없는 일이면 됐고요. (하긴, 소티스 씨도 위급상황은 별로 없다고 했으니까. 어쩐지 떨떠름한 느낌에 쉽게 현관에서 발을 떼지 못하다가 천천히 돌아선다.)
세이지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키요시도 자리로 돌아옵니다.
나눌 이야기가 있다면 가장 적합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네요.
사에키 키요시:(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따금 한담을 나누는 말과 말 사이가 느렸다. 결국 느리게 말문을 열었다.) 내일 아침에 말이야, 진료소 쪽에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세이지 혼자 집에 있을 수 있겠어?
후지세키 세이지:(진료소라면... ... 어둠에 개의치 않고 집을 나서던 어떤 여자의 작은 등을 떠올렸다. 따라가는 것이 더 이상한 모양새일 것이다.) 원래 늘 혼자 있어요. 새삼스럽게.
사에키 키요시:새삼스러웠으면 해서 그렇지. 혼자 있는 게 말이야.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친 뒤에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물잔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예전부터 그랬던 것 같거든. 그때는 공연히 마음이 쓰인다고만 생각했었고.
후지세키 세이지:계속 새삼스러운 편이 나아요. (비 올 때면 차로 데려다주고, 아무렇지 않게 집에 데려가고. 그랬던 기억들이 문득 떠올랐다. 보기보다 사람을 잘 챙기는 건가 싶다가도 어쩌다 한 번씩 가슴께가 뻐근해지던 날들.) ... ...익숙해지기 싫어요.
사에키 키요시:...어쩌나, 나도 두 번이나 말할 정도로 아주 진심까지는 못 되는데. (고개를 기울여서 맞은편의 네 얼굴을 바라본다. 팔을 뻗는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네 손을 가볍게 두드린다. 예전에는 종종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봐달라는 듯이.) 그러니까 그냥 지금 들어줘. 나 그렇게 몇 번이나 그럴듯한 말 해줄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사람 아니야. (네가 익숙해지길 가장 바라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아주 아름답고 깨끗한 사랑만을 자신은 줄 수 없다. 그런 스스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게 말했다.)
후지세키 세이지:정말 바라는 것도 아니면 그런 얘기는 하지 마요. ...그렇지 않아도, (떠날 사람이. 그 말은 끝까지 뱉지 못하고 삼켰다. 말은 양날의 검,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짓이었다.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곳에 있기로 한 것은 자신이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니 그저 눈을 마주했다. 이미 형편 없는 얼굴이었을 것이다.) ...누가, 그럴듯한 말 해달래요? 그럴 수 있는 말만 해요. ... ...어른이잖아요. (좋은 어른같은 건 더는 필요 없다. 가장 무르고 약한 틈만을 파고들었던 약은 어른. 다른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사에키 키요시:(네가 생략한 말이 무엇인지는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굳이 네 입으로 듣고 싶어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무신경하게 되물어야 했던 어제와는 달랐다. 덧붙이지 않는다.) 그럴까. 그럼, 그럴 수 있는 말이나 해볼까.
...익숙해지지 마.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앞에서 꺼내놓은 적 없는 진심이다. 마음은 생각보다 후련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난 후부터는 늘 그랬다. 무엇도 분명하지 못했다. 네가 익숙해지지 않길 바라나, 동시에는 살아가길 바란다. 이 진창의 삶을 나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가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가끔은 이쪽을 바라봐주길 바란다. 저로서도 성가시기 짝이 없는 마음에 실소가 샜다.) 비가 온다고 다른 사람 차에도 타지 말고, 다른 사람 집에도 드나들지 마. 싫은 표정 지으면서도 그 사람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깊게 연관되지도 말고, 그러다가 정에 길들여져서 좋아하게 되지도 마.
웃어줘. 그리고... (그러나 청결한 죽음, 이름은 적히지 않으나 숭고하게 맞이하는 죽음을 나는 너와 함께 포기했다.) 같이 잘까? 오늘.
후지세키 세이지:(늘 이런 식이다. 나는 당신의 말을 하나도 그냥 넘길 수가 없어 언제나 걸려 넘어지고, 당신은 하나도 순순하지 않은 얼굴로 당신의 욕심을 채운다. 내가 어떤 마음인지 뻔히 알면서, 한 번도 져주지 않는다. 부당하다. 그게 항상 억울했다.)
저 비 오는 날 싫어해요. (당신을 만나면 비가 왔다. 비가 올 때 찾은 것인지, 찾을 때 때마침 비가 내린 것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늘 그랬다.) 그러니까 얻어 탈 수 있으면 탈 거예요. 처량하게 비 맞기 싫으니까. ...또 누군가 부르면 같이 있을 거예요. 그때 혼자 있기 싫을 수도 있잖아요.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집 열쇠를 줄지도 모르죠. 그 사람이 겉만 어른에, 밥도 잘 안 해먹고, 담배나 줄창 피우고, 질 나쁜 농담만 하는 사람이어도 신경 써요. 저는 그렇게 해요. 그러다 보면 정이 붙겠죠. ...좋아하게 된다면, 외롭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좋아할 거고, 가끔은 웃겠죠. ... ...그래도,
익숙해지지는 못할 거예요. (비가 오는 날이면 누군가 생각날 것이다. 갑자기 퍼붓는 비처럼 종잡을 수 없는 사람. 한 구석도 분명하지 않은 이상한 사람. 그 입에서 나오는 직설적인 표현이 분해 열이 오르면서 한 켠으로는 안심을 하는 내가 있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처럼, 성인군자처럼 구는 것보다는 낫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쉽게 놓아주는 것보다 기껍다. 차라리 마지막까지 저열해지는 편이 낫다.) ... ...그러니까 같이 있어요. 새삼스럽게.
사에키 키요시:그래. (겉만 어른데, 밥도 잘 안 해먹고, 담배나 줄창 피운다는 이야기에는 맥없이 웃음이 샜다. 분명 너는 그럴 것이다. 그런 일이 있으면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결국에는 사랑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너의 그 사랑은 처음보다는 영리해졌을 것이다. 좋아하게 된 것도 깨닫지 못하다가 상대에게 먼저 들켜 거절을 당하거나, 비겁하게 너를 두고 선 밖으로 둔 채 돌아서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외롭지 않을 것이다. 가끔은 웃을 것이고 그보다 더 종종 행복할 것이다.) ...그거면 됐지.
(영영 당신을 생각하겠다는, 나를 사랑하겠다는 말보다도 그 말이 기꺼웠다. 그제야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혼란했던 마음이 차분해진다. 언어로는 전부 표현할 수 없는 무수한 감정들을 시선에 담아 너를 바라본다. 너의 표정을 보면서도 웃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이리 와, 같이 올라가자.
후지세키 세이지:(조용한 어조에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순순히 네 앞으로 다가가는 중에 고개를 돌려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제 내린 비의 여파인지 축축한 공기가 코끝에 걸렸다. 습한 입자가 피부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 ... (눈 앞의 당신이 아직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됐다. 역으로 차이나는 눈높이가 내심 신기했다. 손을 뻗어 앞머리칼을 어색하게 쓸어본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는 회색빛 도는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는 듯 싶다 찡그리듯 웃었다. 입에서 쌉쌀한 맛이 났다.) ...반지는 빼고요.
사에키 키요시:(손길이 스치면 자연스럽게 감겼던 눈꺼풀을 곧 다시 뜨며 너와 시선을 맞춘다. 네가 웃는다. 그걸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미소가 접혔다. 네가 알지 못하는, 아주 오래전.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웃던 네 모습을 처음 봤을 때처럼.)
(손을 뻗었다. 손바닥으로 네 뒷덜미를 감싼 채 아직 앉아 있는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긴다. 가볍게 맞붙었던 입술이 떨어질 즘에는 입매가 평소처럼 접혀 있었다.) ...올라가자.
(그 어떤 고민이나 망설임도 없이 반지를 빼낸다.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나무 테이블 위로 반지가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도 눈길은 너를 향하고 있었다. 일어서면서 네 관자놀이에 입술을 짧게 누르고는 걸음을 옮겼다. 손을 놓지 않고 층계를 올랐다. 네 방이 아닌, 아내와 자신의 방으로 향한다.)
후지세키 세이지:(사람이라고는 둘 밖에 살지 않는 집이라지만, 너무 조용했다. 하루종일 주인이 자리를 비운 방 안의 기운이 서늘했고, 손가락 사이에 걸려있는 누군가의 손은 그보다 더 온도가 낮은 것 같았다. 방 안에는 자신이 머물던 방보다 조금 큰 침대가 있었고, 익숙한 냄새와 낯선 냄새가 섞여 났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좋지만은 않았지만, 사소한 것을 신경쓰기엔 염치없는 쪽은 제쪽이었다. 등 뒤에서 방문이 닫히자 앞에 선 네 얼굴을 막연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다... ... 예의 애매한 얼굴을 했다. 사실은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이 정말 새삼스러운 탓이다.) ... ...이제 어떻게 해요? (결국 수학 문제에 답을 구하듯 건조하게 물었다. 너라면 알고 있으려나. 어쩐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사에키 키요시:(애매한 표정과 건조한 말씨, 그리고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순진한 물음에 웃음이 났다. 답지 못하게 얼마 가지 못하고 점차로 스러진다. 침대에 걸터앉아 너를 올려다봤다. 쥐고 있던 네 손등을 가볍게 문지른다.) 세이지.
(나는 나의 이름과 사랑을 번갈아 말하는 너의 모든 고백을 얻어내 탐식할 것이다. 살결을 쓰다듬을 것이고, 너의 벗은 몸 모든 곳에 입을 맞출 것이다. 낯선 감각에 몸을 움츠릴 네 서툰 신음 모두를 삼켜가며 벗어나지 못하도록 끌어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방. 다른 이와 머무르고는 했던, 사방이 가로막힌 이곳에서 네 손을 잡아끌었다. 고개를 치어 들었다. 입술을 맞물리기 위해서.)
...입을 맞출 거야. 다음에는 침대에 눕힐 거고, 그리고 옷을 벗길 거야. (담담한 목소리와는 달리 노골적인 문장으로 말한 뒤에도 여전히 웃지 못한다. 입술을 맞추며 턱을 벌린다. 벗어나지 못하게 네 허리를 당겨와 안았다. 괜찮아.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말을 중얼거린다. 도망치지만 마, 어울리지도 않는 절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후지세키 세이지:(끌어당겨져 침대 앞에 가만히 섰다. 자신이 물어놓고, 정작 들려오는 노골적인 문장들에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잖아요, 하는 말은 곧 입 안에 먹혀들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조급하게 벌리려 들었고, 쉽게 파고들었다. 턱을 감싸쥐는 손길이 어느 밤을 떠올리게 해 어깨부터 뻣뻣하게 굳은 것을 아마 너도 느꼈을 것이다. 다만 입술까지 차갑지는 않았고… …그게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도 순간순간을 메우는 소리는 어울리지 않게도 퍽 간절하여 잠깐씩 눈을 떴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으니까.)
(결국 네가 친히 일러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나에 신경쓰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어서 앞선 진도를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가다듬지 못한 숨을 안으로 삼키려 드는데, 그것마저 뺏으려 드는 것이 억울해 힘 주어 밀어내기도 했다. 팔에 허리가 묶여서인지, 실랑이를 하다 무게중심을 잃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즈음에는 무게가 완전히 네 쪽으로 쏠렸다.) 잠깐, ... (잠깐 입술을 뗀 사이에는 숨과 함께 토해내듯 뱉었다.) 힘들어요,
사에키 키요시:(굳은 몸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게 너의 어떤 기억을 불러오게 하는지, 네가 무엇으로 움츠리게 되는지를 알았다. 그걸 먼저 달래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조급해지고 싶지 않았으나 끝내는 움직이지 못하는 너의 혀를 부추겨 얽었고, 고개를 틀며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눈가에 스치며 걸리적거리는 안경을 벗겨 침대 근처 협탁 위로 내려놓았다.)
(체중이 제 쪽으로 실리면 차라리 너의 몸을 떠안아 침대에 눕혔다. 끈질기게 너를 따라붙던 입술이 끝내 어긋난다. 숨을 채우기 위해 물러났던 간격을 다시 좁히려던 차에, 잠시 여유를 주듯 이마끼리 닿는다. 조용하게 이어지는 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뜨끈한 숨이 사이로 번졌다.) ...벌써 그러면 안 되는데.
(불규칙한 호흡을 뱉던 입술이 아래를 향하는 너의 눈 위에, 눈꼬리에, 뺨과 다시 입술 끄트머리에 닿는다. 경직되었던 몸을 어르듯 가볍게 주무른다. 어울리지도 않게 애틋함으로 떨리는 손끝을 감추기 위해 이따금 손을 말아쥐어야 했다.) 괜찮아. (이전처럼 너를 두고서 가지 않겠다는 말도, 이제는 영영 네 곁에 있겠다는 말도 또다시 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괜찮아. (그저 누구한테 하는 것인지 모를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며 흰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눈을 감았다.)
세이지가 아침에 일어나면 키요시가 자리를 비워 집 안이 조용합니다.
[진료소 쪽에 다녀올게. 집 구경이라도 하고 있어. 아침 거르지 말고.]
세이지는 집 안과 진료소를 둘러볼 수 있습니다.
현재 세이지가 있는 곳은 소티스와 키요시의 방입니다.
킹 사이즈 [침대]와 바로 옆에 붙어있는 [협탁], [벽장]과 창문이 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햇빛이 들어오는 방을 조용히 응시하다
침대를 손으로 짚고 몸을 일으킨다. 푹 젖었다 어설프게 마른 뒤처럼 몸이 찝찝했다.)
지난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오래 보고 있으면 조금은 쑥스러운 기분이 듭니다.
.................... (외면)
언뜻 보았지만, 똑같은 침구인데도 한쪽에만 사용감이 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시선을 돌려 옆의 협탁도 본다..)
위에는 키요시의 필체로 남겨진 메모가 보입니다.
서랍을 열어 보면 쓰지 않은 가죽 수첩이나, 줄자, 맥가이버 나이프와 같은 잡동사니가 나옵니다.
잡동사니 더미에서 무언가의 열쇠 꾸러미를 찾습니다.
옆에 달린 택을 확인하니 진료소의 스페어 키 같네요.
열쇠 두 개가 하나의 고리로 묶여있으며 크기는 서로 다릅니다.
이후 진료소에 방문할 일이 생긴다면, 이게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혹시 모르니 일단 챙긴다. ...남의 진료소 키를 챙겨도 되나? 잠깐 고민은 했지만. 뒤이어 창문을 열어본다.)
창문 밖으로는 맑은 날씨 아래 한적한 시골 풍경이 보입니다.
후지세키 세이지:(...오늘은 날이 맑네. 환기를 위해 일단 열어둔다. 벽장도 확인해보자.)
가지런히 나뉘어 정리되어 있다는 것 외에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음... (나는 기분이 미묘해질 짓을 왜 한 거지. 다시 벽장을 닫아두고 옆의 욕실로 향한다.)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을 뿐, 특별한 점은 없습니다.
아직 바닥에 물기가 남은 걸 보니 아침에 키요시가 씻고 나간 모양이네요.
후지세키 세이지:(대충 씻고 손님방으로 향한다.)
싱글 베드 하나와 그 옆에 바로 붙어있는 협탁, 벽장과 창문으로 구성된 손님용 방입니다.
후지세키 세이지:(남방이나 챙겨 작은방으로 건너가자...)
책상 하나와 소파가 놓여 있을 뿐, 별다른 가구가 보이지 않는 방입니다.
굳이 애써서 떠올리지 않아도 도쿄에 있던 키요시의 아파트 거실과 같은 구조라는 것을 세이지는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오랜 시간을 보낸 것처럼 사용감이 보이는 장소이지만, 그에 비해 다른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여기서 지냈었나? 익숙한 구조를 눈에 담다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거실] 과 [서재], [주방]과 [창고]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목이 조금 갈라진 기분이다. 물을 찾아 주방으로 간다.)
식사를 했던 직사각형 형태의 [테이블 겸 조리대]가 존재하며, 그 안쪽에 조리대와 [찬장], [냉장고]가 있습니다.
잘 정리된 냉장고는 최근에 들여놓은 식재료로 들어차 있습니다.
각 부위별로 손질된 고기가 보관통에 들어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냉장고에서 물을 꺼내고는 다시 닫았다. 찬장이나 슬쩍 열어본다.)
허브나 향신료 병은 너무 많아 다 세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몇 개는 라벨이 생략되어 있어 알아보기 힘든 것도 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 기준치: | 65/32/13 |
| 굴림: | 65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후지세키 세이지:(아는 조미료들은 알겠는데... 등을 돌려 테이블에 다가간다.)
후지세키 세이지:(주방에 딸린 창고로 들어간다.)
후지세키 세이지:(진료소의 열쇠와 같이 묶여있는 열쇠는 안 맞나? 끼워 맞춰본다.)
세이지는 열쇠를 맞춰보지만, 크기가 달라서인지 들어가지 않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아니네... (물컵을 들고 거실로 간다.)
중앙에 소파와 [테이블], [텔레비전] 등 가전이 놓여있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포장된 과자가 담긴 트레이와 고루한 소설책이 몇 권이 보입니다.
후지세키 세이지:| 기준치: | 65/32/13 |
| 굴림: | 4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과자 트레이 옆에 열쇠고리가 달리지 않은 작은 열쇠가 있습니다.
조금 전 보았던 창고의 열쇠 구멍과 비슷한 크기입니다.
후지세키 세이지:으음... (열쇠를 챙기고 리모콘을 찾아 텔레비전을 켜본다.)
텔레비전을 틀자 뉴스와 쇼 프로그램등이 송출됩니다.
후지세키 세이지:| 기준치: | 65/32/13 |
| 굴림: | 53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10년이 지났는데, 방영되는 프로그램의 구성이나 화질, 무대 구성 등이 당신이 알던 시대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뭔가... 이상하지 않나? 서재로 향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책장]이 늘어서 있으며, 한 칸 짜리 소파와 [서랍]이 달린 [책상]이 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시선을 자연스럽게 책장에 닿는다. 어떤 책이 있는지 살펴본다.)
주로 소설책이나 의학 서적, 방송 관련 위주로 꽂혀있는 책장입니다.
몇 개는 마을에 있는 도서관에서 구매하거나 빌려온 것 같네요.
후지세키 세이지:| 기준치: | 65/32/13 |
| 굴림: | 32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좀 더 안 쪽으로 들어가거나, 구석을 보자......
같은 책이 몇 권이고 꽂혀있거나 시리즈 소설의 첫 권만 다섯 권씩 꽂혀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가짓수에 비해 책 종류는 몇 개 되지 않는 것 같아요.
후지세키 세이지:| 기준치: | 70/35/14 |
| 굴림: | 11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삽화와 함께 각 풀의 효용과 쓰임새, 다른 이름들이 적혀있습니다.
가름끈으로 표시되어 있는 부분은 두 군데입니다.
투구꽃의 독성 부분과 대마초의 환각 부분에 밑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 (이런 식물들이 의학에 쓰일 일이 있나......? 책을 다시 꽂아두고 서랍을 보러간다.)
서랍을 열어보면 제법 두툼한 종이 뭉치가 나옵니다.
스테이플러로 고정되어 있으며, 누군가의 손글씨로 작성된 것 같네요.
오래되었는지 색이 바래고 귀가 조금 헤져있습니다.
완전히 변하기 전까지는 48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열이 오르고, 눈이 충혈되며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의 본능을 가지게 된다.
사고할 수 있어도 ‘인간성’을 잃어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하나의 방법으로, 신체의 일부분을 잘라내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This message has been hidden.
후지세키 세이지:This message has been hidden.
This message has been hidden.
This message has been hidden.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 좋은 높이의 나무 책상입니다.
필기구나 빈 종이 따위가 책상 위에 놓여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대충 다 확인하면 서재를 나와 다시 창고로 가 열쇠를 끼워맞춰본다.)
꼭 맞게 맞물려 들어간 열쇠를 돌리자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양 옆에 박스가 쌓여있는 [다단 선반]이 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안 쓰는 공간인가?... 굳이 열쇠로 잠가두고. 다단 선반부터 확인한다.)
다단 선반에는 유리병에 들어 있는 알 수 없는 약재나 약초 등이 가득합니다.
그 아래에는 약초를 건조시켜 가루로 만드는 기계가 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 기준치: | 65/32/13 |
| 굴림: | 22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서재에서 본 책에서도 볼 수 있었던 환각·최면을 유발하는 종류의 풀들이 구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으로 보았던 투구꽃과 대마초 역시 가공되어 병에 담겨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 ... (어디서 난 거야? 지나치게 비상식적이고 불건전한 약초들에 땀을 흘리다 철제 상자도 열어본다.)
열어본다면 그 안은 이상할 정도로 깨끗하게 유지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나사나 못 같은 공구가 들어 있지만, 그 사이에 유독 존재감을 내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손잡이가 달려있으며, 원뿔의 끝에는 특이한 모양으로 튀어나온 돌기가 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This message has been hidden.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57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 (다시 철제 상자에 고이 넣어두고 창고 문을 닫고 나온다.)
세이지는 창고 문을 닫고 다시 부엌으로 향합니다.
아직도 두 사람은 돌아오지 않은 건지 실내는 조용합니다.
후지세키 세이지:(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무슨 일 있나. 아까 찾은 키가 주머니에 있는지 확인하고 진료소로 향한다.)
진료소에 들어가려고 하면, 밖까지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립니다.
큰소리가 나는 것이 두 사람이 다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에키 키요시:갑자기 왜 그러냐고 묻고 싶은 건 내 쪽이야. 상의도 없이 그 애는 왜 끌어들인 거야.
소티스:그거야 바깥의 일이니까 저도 모르죠. 하지만 당신이 좋아 할 줄 알았어요. 당신에게 특별한 사람이잖아요. 보고 싶었을 거 아닌가요?
사에키 키요시:내가... 혹시 지금껏 그런 게 필요하다고 한 적 있었나?
사에키 키요시:지금까지 여기서 시간을 보낼 수 있던 건... 그래,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그뿐이야. 이 이상 그 애에게 피해는 없었으면 해. 다시 말하지만, 그 애한테는 이미 충분히...
소티스:곤란하네요, 정말. 세상만사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면서요. 이런 게 당신이 원하는 삶 아니었나요?
사에키 키요시:그거랑 이건 다르잖아. 그건 나한테 일어난 일이고, 어젯밤 일은 명백하게 이상한 일이었어.
소티스:알았어요. 내가 물리게 한 것도 아니잖아요. 따지자면 당신의 문제이니까. 언제든지 끝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창고에 있는 키를 가지고 호수로 가요. 방법은 알려줬던 것과 같아요.
사에키 키요시:……알고 있어.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그리고 세이지가 서 있는 문쪽을 향해 다가서는 발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이지는 민첩 판정을 통해 재빠르게 숨을 수도, 아니라면 자리를 지킬 수도 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어쩐지 들으면 안될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몸을 숨겨 본다.)
후지세키 세이지:| 기준치: | 60/30/12 |
| 굴림: | 5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세이지는 문이 열리기 전, 재빠르게 몸을 숨깁니다.
덕분인지 문을 열고 나온 키요시는 그런 세이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진료소를 빠져나와 집 쪽으로 향하네요.
담배를 무는 걸 보니…… 끊은 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이 뒤로 키요시를 따라가거나, 남아있는 소티스와 대화할 수 있으며 혹은 그대로 들르지 않고 진료소 앞을 떠나는 것도 가능합니다.
후지세키 세이지:(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으니... 소티스에게 간다.)
키요시를 뒤로 하고 당신은 진료소의 안에 들어가 소티스와 이야기를 나누어보기로 합니다.
당신을 보자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인 소티스는 곧 표정을 추스릅니다.
후지세키 세이지:...음.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싸웠어요?
소티스:...네. (잠시 망설이다 곧 수긍했다.)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이었지만, 못 볼 꼴을 보였네요. 미안해요.
후지세키 세이지:...아니요. 그런데... ...저와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죠?
소티스:...... (이번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당신이 있는데 위험한 일이 생겨서 키요시도 놀란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후지세키 세이지:...그렇다면 그런 걸 왜, 소티스 씨에게 화내죠?
소티스:그건... (뭔가를 고민하는지 말을 삼켰다.) 미안해요. 이걸 내가 멋대로 말했다간 그 사람이 화를 낼 것 같네요. 내 선에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에요.
후지세키 세이지:...그렇네요. (그 사람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여전히 아주 많은 것 같으니까. 잠시 뜸을 두다,) 곤란하게 만들었다면 죄송해요.
...어제 그 사람은요? 좀 괜찮아졌어요?
소티스:산짐승에게 물린 모양이에요. 밤에는 상태가 많이 안 좋았는데 지금은 무사히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갔어요. 어제 일은...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요. (사무적이지만 차갑지는 않은 말투였다. 잠시 너의 얼굴을 응시한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키요시는 당신을 무척이나 많이 생각했어요.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나도 알 정도로.
당신의 얘기를 할 때면 표정이 풀어졌고, 가끔은 다른 학생들인 척 이야기를 했지만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어요. 그야 달랐으니까요, 당신 이야기를 할 때만은.
...그래서 여기까지 와준 당신에게 고마워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후지세키 씨. 이곳에 더 머무르는 건 힘들 것 같아요. 나쁜 마음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저 사람이 저런 상태라면, 다른 것보다도 당신의 안전이 위험하니까요.
(입고 있던 가운을 근처 옷걸이에 걸어두고는 가볍게 짐을 챙겼다. 다시 시선이 네게 향했다.) ...마지막으로 저녁을 대접하고 싶은데,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면 알려줄 수 있나요?
후지세키 세이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 말하는 건 꼭... 선생님이 절 위험하게 만든다는 것 같은데요. (그러나 이 이상 대답해주지 않을 것을 예감한다. 처음 이 마을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반듯한 얼굴의 여자에게는 많은 것을 느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당연하게 죄책감이라는 감정에 가까웠고, 그랬기에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말에는 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 ...된장국이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저는.
소티스:키요시가 말한 대로네요. 그래요, 그럼 저녁은 먹기 편한 음식들로 준비할게요.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서려다 너를 본다. 잠시 망설이던 끝에 입을 열었다.) 볼 건 없지만 조금 더 구경하다 돌아와도 돼요. 해가 지면 어두운 곳이니 너무 늦지 않게 와요.
후지세키 세이지:...네. 이따 집에서 봬요. (어쩐지 배웅하는 모습이 되었다.)
소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진료소를 빠져나갑니다.
누울 수 있는 침대가 몇 개 있고 침대 사이사이 커튼이 쳐져 있습니다.
철제 트레이에 이런 저런 약물들이 올려져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작은 문을 열고 들어간다.)
소티스와 키요시의 방에서 발견한 열쇠를 사용해 볼까요?
후지세키 세이지:(이 방에 쓰이는 거였나. 열쇠를 사용해본다.)
이번에도 알맞게 맞물려 돌아간 열쇠 덕분에 문은 수월하게 열립니다.
안으로 들어오자 개인 작업실 같은 공간이 눈에 들어옵니다.
왼쪽 선반에는 치료에 쓰이는 도구들이 정리되어 있지만, [오른쪽 서랍]은 개인용으로 사용하는 것 같네요.
안쪽에 [노끈으로 묶인 종이 뭉치]가 보입니다.
후지세키 세이지:(오른쪽 서랍부터 열어본다.)
그 아래의 서랍을 열어보면 가죽으로 된 수첩이 나옵니다.
10년 전 부터 조금씩 메모하고 있던 것 같네요.
약 10년 정도의 시간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미래에 도움이 되는 데이터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동안 충격을 받은 듯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차로 안정되었다.
꼬박 하루 동안 말이 없던 그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 많은 것들을 물어왔다.
원하는 것이라고는 담배와 작은 방에 놓을 가구가 전부였다.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도서관에 구비되는 책의 가짓수를 늘렸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 헛된 일을 계속하는 걸까.
우리 사이에도 소위 일상이라는 것이 만들어진 듯하다.
어째서 이 사람에게 이런 일까지 베풀게 되었는지.
지금으로서는 나도 분명한 답을 내릴 수가 없다.
결혼을 하는 편이 당신의 신변처리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자료를 찾아본 바 사람이라는 생물은 도저히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변수가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는 혼자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는 걸.
이것이 한 사람이 삶을 마무리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왜 그 당시 그 사람을 죽이지 못하고 이런 일까지 벌였는지, 이제야 나 자신을 이해했다.
생전, 그와 알고 지내던 사람이 이곳에 온다고 한다.
후지세키 세이지:| 기준치: | 65/32/13 |
| 굴림: | 62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후지세키 세이지:(... ...이건. 낯선 필체도, 낯선 필체가 말하는 대상까지도 알 수 있었다. 그냥 읽는 순간 그렇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모를 수 없는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손에 쥔 면의 종이가 구겨질 정도로 쥐고 있음을 의식하고 다시 서랍 안에 집어 넣었다. 안쪽의 종이 뭉치를 살핀다.)
끈을 풀어 종이를 들어 읽어보면, 무언가 그림이 함께 있는 어떠한 장치에 대한 설명입니다.
기본적으로 탈출은 불가능한 것으로 하나,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내부에도 열쇠를 남겨둔다.
열쇠를 초기 생성 시에 지정한 곳에 꽂으면 입방체가 흩어지고 정신은 모두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
왜곡된 것들에 대한 인식 또한 서서히 회복된다.
내부에 열쇠를 보관한다는 건, 내부 현상에 의해 시스템이 다운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므로 적절한 세큐리티를 갖추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는 곳이나, 격리가 용이하다던가, 주의를 둔다거나 등.
어쨌거나 항상 내부 데이터 관리에 조심할 것.
후지세키 세이지:(원뿔 모양의 열쇠...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진료소를 다 살펴보면 미련 없이 밖으로 나왔다.)
진료소를 모두 돌아보고 나오자 해가 뉘엿이며 저물고 있습니다.
더 둘러볼 곳이 없다면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세이지는 키요시 그리고 소티스와 함께 마지막 저녁식사를 합니다.
테이블에는 된장국을 시작으로 전부 세이지가 즐겨 먹던 음식들이 가득하네요.
두 사람의 눈을 벗어난 세이지는, 이 마을에서 무언가 한다면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 기준치: | 65/32/13 |
| 굴림: | 14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세이지는 창고의 철제 상자에서 보았던 기이한 모양의 열쇠와
오늘 진료소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로 미루어보아 문을 여는 장치는 호수에 있음을 예상합니다.
후지세키 세이지:(... ...방을 조용히 빠져나와 창고로 내려간다. 녹슨 철제 상자 안의 원뿔 모양의 열쇠. 조금 무게감 있는 그것을 들고 호수로 향했다.)
새벽 시간, 호수는 은은하게 녹색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곳인데, 어째서 지금까지 몰랐을까요.
호수를 가만히 바라보던 세이지는 호수의 빛이 호수 저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밤이 깊으니 낮에 봤던 빛이 더 선명해진 느낌이다. 물을 헤치고 호수 안으로 들어간다.)
안으로 직접 들어가보면, 호수 속은 밖에서 보는 것 만큼은 더럽지 않습니다.
잉어나 알 수 없는 물고기들이 몇 마리 헤엄치고 있지만 그뿐입니다.
빛을 향해 걸어가자 그곳에는 바닥에 파묻혀있는 기계가 있습니다.
기계의 중앙에는 원뿔 모양의 홈이 파여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그대로 열쇠를 꽂듯 끄트머리의 돌기를 홈에 맞춰 끼워넣는다.)
열쇠를 꽂자, 장치들이 맞물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달이 빨리 기울기 시작하며 주변을 헤엄치던 물고기는 어느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어쩐지 머리 위, 물로 만들어진 천장이 조금씩 낮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호수에 돌 하나가 풍덩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위쪽을 바라보면 수면 위로 누군가의 인영 하나가 일렁이고 있습니다.
세이지가 호수 위에 올라오면 그곳에 서 있는 건 키요시입니다.
사에키 키요시:(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 된다. 너의 얼굴을 바라본다.) ...슬슬 끝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 이쯤 살았으니 만족하기도 했고.
그런데, 세이지. ...며칠만 더 주지 그랬어.
조금만 더 보고 싶었는데. (인상을 찡그린 채로 웃으며 네게 손을 뻗는다. 미미하게 떨리는 손끝을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한다. 그대로 너를 끌어와 품에 안았다.) ...미안해.
후지세키 세이지:(자신을 끌어안는 팔에 힘없이 끌려갈 뿐이었다. 이유를 묻지 않는 당신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저... ...) ...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여전히 모르겠다. 이것이 맞는 행동이었는지는.) ... ...어떤 게요?
사에키 키요시:더 같이 있어 주지 못하는 거. (달이 빨리 기울기 전. 호수의 수면이 낮아지고 물고기가 사라지기 전에. 그곳에 있었을 때와 달리 모든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생의 마지막. 종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상처를 주고 좋아한다고, ...좋아했다고 말 한 번 듣게 하지 못했던 것도.
(손으로 너의 뒷머리를 몇 번 쓸어 만지다가 잠시 떨어지는 체온도 아쉬워 그대로 안았다.) ...그렇지만 세이지, 날 인간으로서 죽게 해 줘.
내 인간성을 존중해 줘.
후지세키 세이지:......해도요. (물에 젖은 몸이 식어가는 탓에 오히려 네 찬 품이 뜨겁게 여겨졌다. 이 정도로 실감나는 곳이라니. 육체는 무엇이고 정신은 무엇인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임은 틀림 없는 걸까... 그런 생각에 헛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더 같이 있을 수 있다고 해도요.
... ... (어깨에 고개를 묻으면 어쩐지 이대로 눈을 감고 싶었다. 이것이 나만의 욕심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에게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에키 키요시:...응, 그것도 미안해. (더 있을 수 있는 방법. 그걸 찾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시간이 있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 없고, 더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수십, 수백 번을 듣고도 한 번쯤은 다시 만나고 싶어서. 원망을 들어도 좋고, 힐난을 들어도 좋으니 다시금 태연한 얼굴로 네게 연락을 하고 끝까지 모질지 못할 너의 생일이 다가오면 함께 밥을 먹고 싶어서. 그녀가 물었을 땐 단 한 번도 해주지 못했던 대답을 너를 품에 안고 나니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지난 십여 년, 나를 세상과 단절시켜 보호하던 세계의 천장이 무너진다. 저 끝에서부터 점차로 어둠이 몰려온다. 언제고 여유롭게 휘어져 있던 입매가 일그러진다. 적어도 초라하게 후회를 하는 최후만은 아니기를 바랐는데, 네가 곁에 있으니 그 마저도 허락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큰일이네. 욕심 같은 건 진작에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혼자서 산다니까 집에도 가보고 싶고, 아르바이트 한다는 서점에 놀러도 가보고 싶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궁금하고. 선생님이 된 모습도 보고 싶어.
(더 말을 하지 못한 채 눈을 감는다. 이마를 찡그린 채로 네 머리카락에 입술을 붙인다. 영리한 너라면 이미 진작에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익숙해지지 마. (물기에 삼켜진 그 말을 유언처럼 남긴다.)
후지세키 세이지:한 번만이요. ... ...전에 말했던 거, 한번만 더 유효하다고 해주면 안돼요? 나쁜 아이가 되라고 했던 거요. (모르는 문제를 짚어줄 때도, 차에서 내릴 때도 시도 때도 없이 선선하게 물어오던,
세이지. 나쁜 아이가 되는 것은 잘 되어가? 하던 그 질문. 이대로 평범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나쁜 어른은 되기 싫었다. 상처는 상처로 되돌아올 것을 알기에, 그것이 누구든 상대는 나보다 더 할퀴는 것에 익숙할 것을, 그런 것에 아무렇지 않을 것을 짐작했기에. 충분히 강하지 못했으니 이 이상 상처받으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매달릴 것은 늘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더이상 잡을 것이 없다. 눈 앞의 이 사람밖에는.) …저 아직 생일 안 지났잖아요.
익숙해지고 싶어요, 저도.
하지만… … 혼자서는 안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한 번만요. (한 번쯤은 누군가 옆에 있는 시간이 익숙했으면 한다. 옆자리가 허전하다는 감각, 누군가 없는 것이 새삼스럽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럴듯한 말, 해주세요. (이번만큼은 거짓말이나 그럴듯한 말이어도 좋다. 만약을 붙여도 좋고 변명을 늘어놓아도 좋다. 자신은 늘 모순적이었으니까.) 그런 거 잘 하시잖아요… … (궤도대로 돌아가는 것은 늘 왜 이렇게 자신에게만 어려운 건지, 중력이라는 건 왜 자신에게만 작용하지 않는 것인지 그때도 지금도 알지 못했다. 하나도 영리한 구석이 없어서는, 누군가를 옆에 둘 만한 요령마저 없는… … 자라지 못한 스물. 손끝에 붙잡은 네 옷자락만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사에키 키요시:...치사하네, 정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다. 차라리 몇 번이고 꾸었던 꿈이라는 쪽이 더 믿을 수 있을 만큼, 간절하고 절박한 문장들에 기어이 눈가가 묵직해진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두고 10년을 더 멀리 걸어온 나는 이번에도 억세게 쥐고 있는 네 손끝에 마음이 아파서. 힘을 주고 끌어안고 있던 너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겨우 품에 떼어냈다.)
말했잖아, 나는 너 예뻐한다고.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말투나 목소리가 형편없진 않은지.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어 결국 아무것도 가장하지 못한 민낯으로 너를 마주한다. 눈과 눈이 마주친다. 그것만으로도 애틋해 애써 지은 웃음이 무색해진다. 뺨을 감싼 채 이마를 맞댄다. 가볍게 맞췄던 입술이 떨어진다. 이미 한 번 포기했던 청결한 죽음을, 기꺼이 너를 위해 다시 한번 더 놓는다.)
세이지, 나쁜 아이가 돼. (나쁜 아이가 되기를. 원하는 게 있으면 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기도 하고, 울음을 터뜨려 끝까지 붙잡는 사람이 되기를. 타인을 위해 참거나 인내하며 네 자신을 깎지 말고, 누군가가 만든 틀에 네 몸을 으스러뜨려 그에 맞추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너로 살아가기를.) ...그래도 곁에 있을게. 좋아할게.
세이지의 정신은 어디론가 빨려 흘러가는 느낌이 듭니다.
어두워진 시야 속에서 당신은 기억을 하나 돌려받습니다.
왜 여태 잊고 있었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기억입니다.
당신은 비가 내리는 날 키요시를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마을에 도착한 당신은 이곳저곳에서 키요시를 찾아 헤맸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여관에 물어봐도 그런 사람은 방문한 적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멀리 보이는 연기 하나를 찾아 이 동굴 앞까지 왔다가……
당신이 찾는 사람이 키요시라는 걸 알게 된 소티스는 당신을 어디론가 데려갔고, 그 뒤에는……
옅은 빗소리와 세이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뜹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곳은 동굴이고, 세이지는 동굴의 벽면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근처에는 바닥에 깔린 시트에 키요시가 누워있으며, 당신을 흔들어 깨우던 사람은 소티스입니다.
소티스:기계의 작동이 정지되었네요. 일어나셨나요?
후지세키 세이지:... ... (귓가에 번지듯 남은 목소리 하나. 여전히 감각이 물속에 잠겨있는 듯 했다. 겨우 고개를 돌려 당신과, 그 사람을 응시한다.) ...선생님은... ....
소티스는 가볍게 눈짓하며 바닥에 누운 키요시를 가리킵니다.
그 표정은 어딘가 괴로운 듯 찡그리고 있습니다.
손을 대어 보면 평소 서늘했던 체온은 데일 듯 뜨겁고, 식은땀을 흘립니다.
옆에는 키요시의 짐가방으로 보이는 게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 기준치: | 65/32/13 |
| 굴림: | 23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피부색이 어둡고 거칠단 사실을 깨닫습니다.
동공을 확인하면 눈동자는 충혈되어 있고, 손톱이 날카롭습니다.
소티스:구울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겠죠. 한 시간에서 두 시간쯤 지나면 완전히 변이될 거고 나는 그 즉시 그를 사살할 겁니다. 내가 맡은 임무는 이 지역 일대의 구울을 전부 말살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마주친 시각, 그는 아직 구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시간 동안 남은 삶을 살아볼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었습니다. (조금 전과는 다른 딱딱한 말투였다.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지세키 세이지:... ...제가 데리고 돌아왔어요. (거뭇하게 물든 손을 감싸듯 손을 얹고는 소티스를 바라본다.) 아직 아니에요. ... ...멈출 수 있잖아요.
소티스:본질적인 해결 방법은 아닐 텐데요. 어디까지나 유예에 그치지 않습니다. 완전히 구울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닌데 그게 의미가 있나요. (키요시의 목숨을 구제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으므로 애초부터 선택지에 두고 있지 않은 사항이기도 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후지세키 세이지:...더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이런 이유를 누군가 이해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그게 전부였다. 묻기 전에 행하고, 되지도 않는 고집을 부려서 너에게 꾸역꾸역 대답을 얻어내고... ... 최소한의 인간성도 무시한 채 불완전한 목숨을 연명한 이유. 전부 욕심이다.) 그거면 돼요.
소티스:나는... 정확히는 방금 전 10년간의 정신이 돌아온 나로서는 여전히 그가 인간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가 5년을 들여 노력했으나 더는 방법이 없을 깨닫고, 다시 5년을 들여 결정한 사안이니까요. (무감하게만 보였던 눈동자에는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규명할 수 없는 혼란이 스쳤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 역시 이해합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정말로 그걸로 만족합니까?
후지세키 세이지:... ...말릴 줄 알았어요. 당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텐데도요. (무감했던 얼굴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짐작하는 나는 당신에게도 걸리는 구석이 너무 많아서. 그저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누워있는 남자의 이마를 덮었다. 열은 빠르게 옮겨 미적지근했던 손바닥이 금세 뜨끈해졌다. 손을 조금 아래로 내려 감긴 눈 위를 덮었다. 이상한 일이다. 열을 식혀주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었는데.) 그거면 돼요.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그것 외에는 필요 없다는 듯이.)
소티스:그를 아무런 대처도 없이 데리고 돌아간다는 선택지를 택했다면 불허했을 겁니다. 저 역시 다할 사명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를 존중합니다. 끝을 낼 사람도, 연명을 택할 사람도 내가 아닌 당신이겠죠. (그리고는 총 한 정을 네 옆에 내려두었다.) 지금 그에게 주문을 사용할 것인지, 아니라면 그 총으로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하게 도울 것인지는 당신의 선택입니다.
세이지는 원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키요시를 살해하거나, 마력 10과 이성 1d8을 이용해 다잘의 유예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곳에서 세이지가 키요시의 목숨을 끊지 않거나 주문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소티스가 그의 목숨을 끊습니다.
후지세키 세이지:전... 한 번도 바라는 것을 제대로 욕심 낸 적 없었는데. 그건 바라는 것을 이루는 일은 무척 힘들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을지도 몰라요. (...겁쟁이거든요, 저는. 작게 중얼거리고 제 옆에 내려둔 총을 담담히 바라 보았다.) 다행이에요. 바라는 건 이렇게 어려운 일인데... ...반대편에 있는 것은 그보다도 어려운 일이네요. (손은 내려가 네 목께에 닿았다. 옅게 뛰는 맥박. 그 여린 박동을 손끝으로 느끼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기적인 선택을 하자. 너의 애정을 빌미로, 치사하게 굴어서라도 얻어낸 시간이니. 마지막까지 저열해지자. 비겁하자.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듯 다잘의 유예를 외운다. 미안해요. 누군가에게 속삭이듯 건네는 사과를 마지막으로 입을 닫았다.)
주문을 사용하면 키요시의 호흡이 진정되고 체온이 내려갑니다.
충혈되었던 눈이 서서히 본래의 색을 되찾습니다.
그는 당신에게 어떠한 적의도 내비치지 않습니다.
소티스:다잘은 거짓된 메시아이자 사기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기 전 나타나는 거짓말쟁이로, 거짓 종교로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죠. 그런 사람이 주는 유예는 불완전할 거예요. 그래도 만족하시나요?
후지세키 세이지:...저도, 소티스 씨도 완전하지는 못할 걸요. (어렴풋하게 웃었다.)
그녀는 세이지가 키요시를 데려가는 것을 용인합니다.
소티스:본래 저는 이 사람을 마주치자마자 사살해야만 했습니다.
무엇이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것을 망설이게 하는지……
십 년간 생각해 봤지만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조금 더 감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온기를 머금은 표정.
소티스:그래도 저 역시 이 사람이 없어지면 조금 외롭다고 느끼겠죠.
이 사람이 지난 10년간 당신을 생각하며 그랬듯이요.
깊은 안쪽에 있던 기계는 몇 번의 손짓만으로 간단히 정리됩니다.
이제 이곳에는 살아있는 인간만이 세 사람 존재합니다.
동굴 밖으로 비가 내리고, 그 입구로 소티스가 나섭니다.
소티스:당신이 사용한 주문은 어디까지나 유예일 뿐,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그때는 이번보다도 다 빠르게 변이하게 될 겁니다.
주의하세요. 다시 나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면요.
고맙습니다. (그 말이 더 적절한 것 같아서였다.)
소티스:저야말로요. 내가 왜 당신이 진료소를 돌아보도록 두었을 것 같나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그 말과 함께 동굴을 빠져나갔다.)
사람이 떠나 조용한 동굴에 두 사람만이 남습니다.
키요시의 옆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면, 곧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키요시가 눈을 뜹니다.
그는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당신을 보며 말합니다.
후지세키 세이지:... ...네. 살아있어요.
사에키 키요시:무사히 나쁜 아이가 된 거 축하해, 세이지.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네 뒷목을 감싼 채 그대로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입술이 닿으면 그때는 조금 웃었다.)
후지세키 세이지:... ...생일, 같이 밥 먹을 거죠. (익숙한 정도의 힘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조금의 힘도 없이 풀어진 채다.) 이제 어떤 어른이 됐으면 좋겠어요?
사에키 키요시:그래야지. (그걸 위해 살아남았다. 네가 원하는 것, 간절히 바라는 것 하나를 이루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내려두었다. 그러니 대답은 처음부터 자명했다. 평범한 어른이고, 나쁜 어른이고. 상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어떤 어른이든 곁에 있을게. 좋아할게.
두 사람이 저곳에 발을 들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나요?
돌아가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합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삶이 얼마나 의미있을지. 얼마나 지속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