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의 밀도가 높았다. 걷는 것도,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애를 먹을 만큼. 세이지는 창틀에 포개어 두었던 손을 물렸다. 곧 비가 내릴 테다. 뺨의 솜털이 축 늘어져 있었고, 어깨는 무거웠다. 어제 잠깐 해가 나는가 싶더니 아침부터는 새까만 먹구름이 몰려오는 게 또렷이 보였다. 우산을 챙기라는 조부의 말을 못 들은 척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오늘은 우산 같은 걸 들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세이지는 생각했다. 누가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합리화가 고개를 들었다. 비에 젖는 것도 나야. 손해를 보는 건 나야……. 도둑질이라도 한 마냥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세이지는 어떤 생각이라도 끌어다 와야 했다. 비참할지라도.
어째서 그런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를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지난 국어 지문에서 봤던 것과 같이…… 사춘기의 청소년은 미성숙하니까. 세이지는 습기에 끝이 말린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보건실은 물 먹은 먼지가 무겁게 굴러다녔다. 담당하는 선생님이 부재하는 틈을 타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능동적으로 땡땡이를 쳐본 일이 없으니 무엇부터 해보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역시 나쁜 일은 세이지의 특기라고 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비 맞지 않게 대비하라는 말을 무시하는 것뿐이다. 세이지는 스스로를 향해 혀를 찼다.
창문 너머에서 구령 소리가 들렸다. 야구부원들이 한쪽에서 우르르 몰려나왔다. 비가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연습이라도 하려는 건지. 물론 세이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장면이었다. 오히려 세이지는 그들이 보건실 창문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눈을 떼지는 않았는데, 밖을 내다보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실로 돌아가자니 굳이 머리가 아프다며 양해를 구한 일이 우스워질 것 같았다. 일없이 교내를 거닐다가 의아하게 여긴 어른이라도 만나면 최악이었다. 특히 그…….
문이 열렸다. 기척을 듣기 무섭게 세이지는 침대 위로 몸을 무너뜨렸다. 너무 요란하지는 않게. 누가 들어왔건 간에 꾀병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텅 빈 보건실에 당당히 자리 잡은 불량아가 누구인지 알리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세이지는 얇은, 거의 냅킨에 가까운 이불을 슬쩍 목 위까지 끌어 올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안쪽으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보건실을 울렸다. 세이지는 이제 골판지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는 매트리스에 몸을 거의 파묻을 듯했다. 아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숨을 죽이고 있노라면 서성거리는 움직임이 진득한 공기를 타고 넘어와 세이지의 뺨에 닿았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구령을 외는 이의 우렁찬 목소리가 넘어왔다. “전국 대회가 우스운가!” 이전 경기에서 뭔가 잘 풀리지 않은 게 있기라도 했는지. 세이지는 간혹 운동부원들의 단순함이 부러웠다. 실수를 곱씹기보다는 소거할 방법을 찾는 그 본능들이.
내 모든 문제도 그렇게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이지는 숨을 얕게 쉬었다. 안 그래도 습도가 너무 높아서 숨을 쉬는 게 아니라 물을 코로 마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정신이 팔려있노라니 어느새 발소리가 멎어 있었다. 금방 이렇게 된다니까. 세이지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보건실로 불쑥 들어온 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눈을 감은 채 캐내고자 했다. 그러나 정신을 어지럽게 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 시트에서는 묵은 먼지 냄새가 났다. 창문을 뒤흔들 만큼 커다란 기합 소리도 끊이질 않았다. 비가 얼른 왔으면 했다. 이젠 먼지 냄새 위에 가볍게 깔린 융단 같은 연고와 소독약 냄새마저 느껴졌으므로.
어서 다시 혼자가 되고 싶다.
생각 속을 유영하는 때 이마에 숨결이 끼쳐 왔다.
“…… …….” 생각이 전부 무용해지는 순간이었다. 세이지가 눈을 번쩍 떴다. 어깨는 조금 움츠리는 게 전부였다. 무슨, 하고 조그마한 신음이 뱉어졌다. 눈앞에는 태연자약한 웃음을 희미하게 머금은 키요시가 서 있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 상체를 애매하게 기울인 채였다. 막 불을 지르려는 악동처럼 진위를 구분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세이지는 놀라움과 불쾌감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을 달래고자 숨을 골랐다. 눈이 제대로 마주쳤는데도 키요시는 불편함이라곤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역시 안 자고 있었네.” 그가 말하더니 멋대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일, 키요시의 집에서 벌어진 대사건 이후로 첫 대면이었다. 세이지는 그 밤으로 사고가 기우는 걸 막기 위해 숨마저 참았다. 얼굴이 곧 달아올랐다. 수줍음 때문이 아니었다. 순도 높은 분노가 부글거렸다. 물론 공기 중의 습기를 양분 삼아 끓어댔다. 세이지가 모멸감과 어리둥절함 사이에서 몸을 떠는데도 키요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은근슬쩍 손을 뻗어 세이지의 팔뚝을 잡기까지 했다.
마치 우리 괜찮은 거지, 하고 묻는 것처럼…….
그럴 리가 있겠는가? 세이지는 과장을 조금 보태 죽을 만큼 힘들었다. 단 하루도, 그날 이후 단 하루도 키요시의 생각을 하지 않은 밤이 없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무거운 공기가 몸을 짓누르도록 두는 것에 죄책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바람이 입술 위를 스칠 때, 키요시와의 맞물림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슷하게 축축했었지. 조금 더 뜨거웠고. ……아니, 아니. 아무리 사춘기라지만 너무하잖아. 세이지는 스스로에게 경멸을 들이부었으나 이성은 번번이 어둠과 습도 앞에서 패배했다.
나도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다고. 종래에는 억울했다.
모든 책임을 유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건 명백히 키요시였다. 상처를 받은 쪽은 세이지였고. 세이지는 그다음 날 무척 진지하게 조퇴를 고민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세이지의 인상은 엉망이었다. 누구라도 세이지가 아프다고 한마디만 하면 집으로 가는 택시라도 잡아줄 것만 같았다. 점심 전까지만 해도 시름시름 앓던 세이지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는데, 실실 웃으며 여학생들과 실없는 농담을 해대는 키요시를 맞닥뜨렸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가 뭐라고 했었더라.
“이게 누구야, 후지세키잖아. 아니… 유령인 줄 알았네.”였던가. 아니……. “왜 죽을상을 하고 있어?”라던가……?
어느 쪽이든 세이지의 마음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고, 세이지는 그와 학우들을 지나쳤다. 그리고 곧장 교실로 돌아와 문제집을 풀며 마음을 달랬다. 조퇴 욕구는 완전히 꺼져서 아득바득 종례까지 버티고 앉아 있었다. 하루가 끝난 뒤 얻은 건 성취욕이 아닌 허탈함이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게 세이지였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휘둘리는 것 같아 열이 올랐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성적인 판단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다가도 키요시 앞에만 서면 통제란 불가능했다.
원래 통제란 단어가 있기는 했는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전부 그의 탓이었다. 그럴 만한 짓만 골라 하지 않았던가.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데 귀재였고, 조금만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어 들면 물속의 물고기처럼 유려하고 매끄럽게 피해갔다. 그런 걸 몇 번이고 겪은 누구도 세이지처럼 굴지 않을 거란 장담은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사람을… 미치게 했다…. 어떤 부차적인 뜻도 함의도 없었다. 말 그대로였다. 정말로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세이지.” 키요시가 싱글 웃었다. “오랜만에 보네….”
세이지의 눈길이 그의 입가로 옮겨 갔다. 무어라 말이라도 해야 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런 마음을 알아서였는지, 단순히 그가 가진 요령이었는지 알 수 없게 키요시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일순 눈이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금세 그 자리에 흥미가 대신 차올랐다. 세이지는 자신이 키요시를 너무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눈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실 같은 게 시선을 그에게 엮어둔 듯했다.
야구부네. 키요시가 중얼거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의 몸은 꽤 봐줄 만했지만, 운동과 연이 깊어 보이진 않았다. 세이지는 의도완 다르게 멋대로 고개를 들려는 호기심을 억눌렀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세이지가 할 일이라고는 이 불청객을 당장에 내쫓는 것이었다.
“나는 부담임이잖아. 세이지, 어디 있는지 아는 건 쉽다고.” 키요시가 선수를 치더니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는 누운 세이지 너머의 창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비가 올 것 같은데. 그런 말이 이어졌다. 세이지는 상체를 어정쩡하게 일으키다가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더 움직이면 그와 필연적으로 스치게 될 것이었다.
여기서 더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게 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그랬다간 잠은커녕 밤마다 달리기라도 해야 할 판이었으니.
“속이 안 좋아서요.” 세이지는 최대한 중립적이고 건조한 투로 말했다. 그러나 따라붙은 작은 한숨까지는 숨길 겨를이 없었다.
“두통이라고 했다던데?” 키요시가 소리 내어 웃었다. 세이지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보건 선생님이 걸어둔 작은 고양이 모양 헝겊 인형이 커튼 봉 끝에서 달랑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거기에 시선을 거치하는 게 나을 것이었다. “…….” 세이지가 침묵하자 키요시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세이지는 알았다. 방식이 다를 뿐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같았다. 제 할 일을 관철하며 고집을 피우는 것. 세이지는 입을 다물고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편이었고 키요시는 한시도 세이지를 가만두지 못하는 쪽이었다.
“엄청 혼나네.” 침묵을 서겅서겅 잘라내며 키요시가 상체를 더 숙였다. 이제 그의 낯은 티브이라도 보는 것처럼 환해져 있었다. 세이지는 그것을 곁눈질로만 보았다. 좀만 더 숙이면 살짝 위로 솟은 무릎이 그의 가슴에라도 닿을 것 같았다. 그만두라고 해야 할까. 어떤 이유를 들면서? 당신이랑 닿을 것 같고 그건 참을 수 없으니까 당장 비키라고? 하지만 여긴 학교였다. 키요시가 이렇게 멋대로 보건실에 드나든단 건 다른 이도 마찬가지라는 뜻. 언제 누가 문을 열고 들어와 이 시간을 방해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결국 세이지는 자신이 납작해지기를 택했다. 종아리에 힘을 풀고 다리를 일 자로 뻗었다. 상체는 다시 녹아들 것처럼 누워서 매트리스에 등이 꼼꼼하게 닿았다. “그럴 만해. 저 녀석이 투수인 것 같은데, 허우대만 멀쩡하지 영 힘을 못 쓰게 생겼잖아.” 세이지가 그러거나 말거나 키요시는 저 할 말을 툭툭 쏟아냈다. 세이지는 입술 바로 위에 얹어진 말을 숨으로 밀어낼지 그러지 않을지로 깊게 갈등했다.
키요시에게는 이상한 마력이 있었다. 함께 있으면 그 기질에 끌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단 세이지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그랬다. 세이지는 일전에 복도에서 보았던 그와 학생들을 다시 꺼내 들었다. “선생님, 선생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복도에 몇 겹이나 쌓여 있었다. 키요시는 그들 전부를 귀찮아하면서도 웃음을 잃지는 않았다. 사려라기보다는 차라리 무관심이었다. 학생이 교사와 지나치게 교차하며 일종의 구도가 생길 때 발생하는 문제를 전혀 인지하지 않은 사람의 무심함.
세이지는 그걸 알아버린 게 불운하다고 여겼다.
미리 눈치챘더라면 불상사를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세이지가 눈을 굴렸다. 키요시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턱에서 떨어져 매트리스를 느슨하게 짚은 손. 야구 이야기를 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고…… 그런 기분을 심어주는 손이. 불쑥 다가왔을 땐 정말 놀랐지. 불에 덴 것처럼 아팠었지. 그간 사이에 꿉꿉하게 끼어 흐르던 공기의 형질을 완전히 무시한 그 물리력이. 투명함을 헤집고 들어와 턱을 움켜쥐고, 입술이 견딜 수 없게 가까워지고, 속눈썹이 생각보다 길다는 깨달음이 이마 앞을 스치고, 맞물렸다. 술 냄새가 났다. 아니…… 그보다는 맛이었다. 담배보다 나쁘잖아. 세이지가 밀어내려는 힘을 상쇄하는 단호함이 키요시에게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태도였다. 그는 언제나 세이지를 잡지도 세이지에게 잡히지도 않는 거리를 유지했지 않나. 반보 떨어진 곳에서.
세이지를 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굴었던 건 그게 처음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야구…….” 세이지는 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얇고 흰 천 아래에서 자신의 형체가 서서히 사라지는 기분을 만끽했다. 한숨이 뱉어졌다. “좀 아시나 봐요.” 그 자신조차도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여기서 나가라거나, 지금은 당신을 보고 싶지 않다거나 하는 말이 어울리는 순간이지 않은가. 그런데 뭐, 고작, 야구를 좀 아냐고? 세이지는 자신의 무른 곳을 어떻게 도려내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 외야수였거든.” 키요시는 그저 세이지가 다시 관심 가져 주었단 게 기쁜 듯했다. 어깨를 넓게 편 그가 창문에서 시선을 떼어 세이지에게 두었다. “고등학교 때. 코시엔도 갔었는데?”
세이지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 순간 비가 쏟아졌다. 어떤 기별도 없이, 갑작스럽게 몰아쳤다. 순식간에 창문이 빼곡하고 작은 물방울로 뒤덮이고 사나운 바람이 으르렁거렸다. 야구부원들이 우왕좌왕하며 소리치는 것이 빗소리에 묻혀 멀어졌다.
“놀랄 일인가?” 키요시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의 반응 덕분에 세이지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좀, 안 어울리긴 해요.” 키요시가 워낙 자기 얘기라곤 하는 법이 없었기에 더욱 얼떨떨했다. 한참 달려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좁아진 거리감에 혼란을 느꼈다. 위험해. 세이지는 다시 방도를 생각해야 했다. 턱을 쥐러 다가오던 손처럼 공기의 밀도를 뒤흔드는 키요시의 방식으로부터 멀어질 길을.
“에, 어째서.” 키요시가 느긋하게 물었다. “면접관들이 좋아하는 주제야, 이거. 세이지는 좀 늦었지? 부활동 같은 걸 하면 좋은데.” 키요시는 단숨에 이 자리를 진로 상담 세션으로 만들었다. 세이지는 그에 반발심을 느꼈다. “대입에 좋으니까요?” 목소리가 어쩔 도리 없이 날카롭게 나왔다. 바로 그렇지. 키요시가 웅얼거리며 기지개를 켰다. 몸이 쭉 늘어난 그의 외곽선을 따라 번개가 번쩍 들이쳤다가 물러났다. 세이지가 움찔거렸다.
“여러모로 신경 쓸 시기잖아.” 강한 빛에 순간적으로 노출되었음에도 키요시는 시큰둥했다.
“선생님이 쓰실 건 아니죠. ……다 정해진 거니까.” 큰 이변이 없다면 세이지는 국어교육과에 진학할 것이다. 정말로 가르치는 것을 해낼 수 있을는지는 몰랐지만. 눈앞의 이 남자를 보면 어떤 교육도 그보다 못하진 않을 자신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난 적어도 학생이랑 키스 같은 건 안 할 거라고. 세이지는 생각했고, 곧바로 후회했다. 자신이 그 순간에 얽매 있다는 걸 시인하는 꼴이었다. 답답함에 결국 다시 상체를 일으켜 앉은 세이지가 한숨을 푹 뱉었다. 철제 등받이에 기대니 키요시의 시선이 따라왔다. “그래도 선생님인데. 일단 기간제지만?” 떠날 사람은 언제고 어떤 말이고 할 수 있다.
세이지는 그 말을 무시했다.
비가 계속 내렸다. 이제 공기는 물과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세이지, 우산 있어?” 키요시가 문득 물었다.
의도가 뻔했다. 세이지는 이제 그의 행동양식을 거의 파악했다.
“있어요.” 그러니 대답은 간결했다. 거짓을 숨기려면 말을 삼가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 키요시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눈을 끔뻑거렸다. 창문 바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찬 비였다. 잠깐만 나가 서 있어도 온몸이 흠뻑 젖을 것이었다. 세이지는 머릿속이 아득해졌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솔직히, 누가 올지도 모르겠고.” 이제 가 주세요. 내내 고민하던 말이 쉽게도 이어졌다. “왜?” 키요시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그가 손을 뻗어 얇은 이불 아래 세이지의 무릎을 덮었다. 세이지의 몸이 위로 화들짝 튀어 올랐다.
“누가 보면 안 될 짓이라도 할 건가?” 지독한 데자뷔. 키요시는 다시 한번 이 난삽함의 문제를, 무딘 화살촉을 세이지에게 돌렸다.
그건 세이지를 분노케 하기에 충분했다. “선생님이랑요?” 이제 음성엔 고저가 없었고, 말씨가 무척 빨랐다. 세이지는 얼른 무릎 위 손을 던지듯 치워내고는 어깨를 떨었다. 최악이야. 잠시나마 두 겹의 천 위로 느껴지는 손바닥에 마음이 기울었던 게 바보 같았다.
복도에서 누구와 마주치고 어떤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든 이제 관계없었다.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키요시가 비키거나 물러나지 않는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내가 가야지. 세이지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가 과거에 야구를 했건 농구를 했건 세이지가 알 바는 아니잖은가. 시시한 말로 시간을 끌며 결국 굴복하게 하려는 속셈일 테다. 세이지, 세이지, 바보처럼 불러대면서. 네가 원했잖아. 결국에 하고 싶은 말은 그뿐이면서.
허울 좋은 회피와 면책. 키요시를 반으로 가른다면 그런 것으로 가득 차 있을 테다.
이딴 게 어른일 리 없잖아. 세이지는 의도적으로, 심술궂게 자신의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키요시가 묘한 눈으로 그것을 훑었다.
저 자신만 신경 쓰고 미칠 노릇인 게 억울했다. 세이지는 그러니 더 열성적으로 복기했다. 어떻게 닦아내고 싶었는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재현하며 키요시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날의 공기는 유달리 끈적끈적해서, 집으로 돌아올 적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다. 여러 의미로 세이지는 절대로 잊지 못할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또한 그래야 맞지 않나.
어째서 나만이 이렇게나…… …….
“그만둬. 입술이 찢어지겠어.” 키요시가 나지막이 말했다.
“습도가 이렇게 높은데, 말도 안 돼요.” 세이지가 받아쳤다. 그러면서도 입술이 아린 건 사실이었 으므로 곧 손이 떨어졌다. 허탈한 소음과 함께 허벅다리 위로 창백한 손이 늘어졌다.
키요시는 복잡한 미소를 입가에 건 채 시선을 이리저리 흘렸다. 여유를 되찾고, 모순의 내실을 복원한 뒤 슬쩍 피할 생각인 듯싶었다.
“이따 데려다줄까?” 바로 이렇게. 세이지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터뜨렸다.
뭐가 문제야? 키요시의 눈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나쁘지 않잖아. 선생과 학생 사이에 할 일을 해준다잖아. 넌, 뭐, 내가 조금은 더 관심을 가졌으니 괜찮지? 그때 그건 그냥 사고였잖아. 너도 직접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고 있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나는 술도 꽤 마셨고, 너도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였고, 비는 내렸으며……. 키요시의 머릿속을 떠다닐, 어쩌면 그저 세이지의 환상일 뿐인 문장이 산소를 밀어내고 꾸역꾸역 들어찼다. 세이지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키요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목구멍이 좁아지며 뜨거운 감정이 단전에서부터 밀고 올라왔다.
토하며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후지세키 세이지는.
입술을 달싹거리면 건조한 마찰음이 눅눅한 공간과 어울리지 않게 일어났다. 앞니로 아랫입술을 질겅거린 세이지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비가 무섭게 내렸다, 여전히. 창문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세이지는 그 진동이 점도 높은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것에 함께 떨었다. 분노인가, 추위인가? 구분하는 건 무의미했다. 세이지는 언제나 둘 모두를 느꼈다. 키요시의 앞에서. 그의 무심함은 너무 차가웠고 너무 부당했다.
목구멍에서 간질거리던 문장이 구체성을 갖추었다. 이제 일촉즉발의 총알이었다.
세이지가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어떤 사람은 전부 원하죠. 선생님 같은 사람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요.” 말은 빠르게 입술을 벗어났다. 세이지는 뱉은 즉시 자신의 공격성을 검열했다. 한심한 짓이었다. 지금이라도 일어나 나가는 게 옳았다. 키요시와 정면으로 맞닥뜨려 벌어들이는 성취는 하찮았다. 분명 어떤 결과에 도달하든 잃은 건 세이지일 텐데.
“아니야, 세이지. 나도 때로는 원해.” 키요시가 점잖게 대답했다. 눈을 감고 들으니 참으로 어른스러웠다.
거짓말이야. 세이지는 생각했다. 눈꺼풀을 들자 직전보다 살짝 어두워진 조도에 눈이 침침했다. 비가 내리는 날은 언제나 빠르게 밤이 찾아왔다. 키요시는 정말로 그 자신의 말을 믿는다는 듯이 무구한 표정이었다. 늘 매달던 웃음기마저 옅어져 있었다. 속으면 안 돼. 세이지는 제 허벅지라도 비틀어 꼬집고 싶은 욕구에 휩싸였다.
물러설 것인가, 그러지 않을 것인가.
세이지는 키요시와 자신 사이에서 느릿느릿하게 흐르는 투명의 점도를 감각했다.
가를 것인가, 그처럼? 그리고 난 다음에는? 혀가 움찔거렸다. 단어들은 준비되어 있었다.
“어른이 되면 원하는 걸 다 가질 순 없단 걸 배울 뿐이지.” 세이지가 한참 조용하자 키요시가 덧붙였다. 어두워져서일까, 그는 왜인지 모르게 초조해 보였다.
“성냥을 긋는 사람은.” 세이지가 찌푸렸다. 고통의 현상이었다.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숨길 수 없는 표정이었다. 결국 세이지는 점성을 이겨내고 그에게 날을 겨누는 쪽을 택했다. “밝음을 떠올리며 불을 원하지 않아요. 잠깐이잖아요. 잠깐 타오르게 할 아주 작은 불을 원하는 거잖아요.”
그게 너의 본질이잖아. 담뱃불을 붙이는 정도의 불꽃만이 필요한 사람. 점화가 끝나면 성냥을 비틀고 바닥으로 내던지는 사람. 당신 행동의 전부가 그것을 말하고 있는데. 세이지는 갈증을 느꼈다. 입안이 텁텁했다. 단어를 머금고 있는 편이 나았을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건은 벌어졌고, 총알은 과녁을 향해 날아갔으며, 비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것이다. 전부 돌이킬 수 없었다.
키요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낯설어진 옛 친구를 보는 듯이 상체를 뒤로 뺐다. 눈은 약간 커져 있었고 입은 굳게 다물린 채였다. 당장 칼을 든 괴한과 마주쳤어도 그런 태도는 아니 보일 사내였는데. “그리고, 저는요, 선생님.” 내가 왜 이 얘기를 하고 있어야 하지? 세이지는 그저 끝맺기 위해 계속 주절거렸다. 저 앞의 선로가 끊긴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열차의 기분으로. “어느 쪽도 아니에요. 이를테면 저는, 하나만 원하는 사람이에요. 단 하나. 그게 제가 원하는 거라고요….” 세이지는 자신의 말이 가진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일어났다.
키요시의 몸이 살짝 밀려났다. 세이지는 두 다리를 침대 밑으로 내리고, 신발에 발을 구겨 넣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사이사이 빗소리가 무섭게 끼어들었다.
세이지는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벽면의 시계를 확인했다. 그와 고작 이십 분을 앉아 있었을 뿐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직 종이 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세이지가…….” 키요시가 느리게 입을 열었을 때, 세이지는 아주 약간의 희망을 가졌다.
어쩌면 그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대화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들어선 만큼 물러나는 게 아니라 그 또한 적극적으로 맞부딪쳐 오는 그림이 그려질는지도. 이렇게나 나왔으니 그러지 않는 게 더 어렵겠지. 일종의 우쭐함마저 들었다. 세이지는 키요시에게 등을 보인 채 발끝으로 바닥을 소리 없이 두드렸다. 듣고 있어요. 그런 뜻이었다.
“국어 성적이 우수했었지.” 그러나 키요시의 맺는 문장은 형편없었다. 세이지가 기대한 그 어떤 기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당신은 그래, 그런 사람. 다시 투명한 장막이 드리운다. 언제 갈라졌었냐는 듯, 날붙이가 대수냐는 듯 접합한다. 잠깐 뚫렸던 구멍이 촘촘해진다. 끈적한 우울감이 아교처럼 수복을 돕는다.
세이지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등이 축축했다. 그와 세이지 사이에 가득한 태연하고 밀도 높은 공기가 흐른다. 느릿느릿하게 유동하는, 볼 수 없는 장애물. 그것 때문에 세이지가 어떤 말을 해도 키요시에게는 이상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휘어져 가닿았다. 중간에 투명의 점도가 문장을 완전히 다른 성분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 뉘앙스마저도.
세이지는 더 지체하지 않기로 했다.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혹은, 나쁜 짓을 더 저지를 것만 같았다. 오늘은 이미 지쳤기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더는 이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니 걷는 것이다. 문을 향해서. 그러면서 다시 시계를 보면 수업이 끝나기 오 분 전이었다.
걸음이 더뎠다. 겔처럼 끈끈해진 공기가 팔다리를 휘감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세이지의 걸음은 말처럼 날카롭지를 못했다.
큼직한 격자무늬가 새겨진 바닥을 보며 걷던 세이지는 마침내 문에 다다랐다. 문고리에 손을 얹었을 때 느껴지는 건 뜨거움이었다. 세이지는 재빨리 현실로 돌아왔다.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어른과 옥신각신하며 실랑이를 벌이지 않는 착한 아이의 자리로. 나쁜 짓을 전생의 일인 양 회상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리고 웃는 조용한 범인의 마음으로.
돌아보지 않는 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렇게라도 키요시가 이 사안의 중대함을 알아준다면. 세이지는 이런 자신이 비난 받을 여지가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거 알아요?” 문을 바로 열지 않고, 세이지가 말했다. “선생님을 정말 싫어해요.”
언제나 거짓은 키요시의 앞에서 너무 쉽게 진실을 드러내곤 했다.
번개가 내리쳤다. 문고리에 반사된 빛이 세이지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세이지는 끔찍함에 고개를 저었다.
“수학 선생님의 비극이지.” 키요시가 뒤늦게, 다시, 웃었다.
세이지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역으로 되돌려주려는 듯이.
나쁘고 비겁한 방식이었다.
비가 육중한 물방울을 흩뿌리는 소리가 여전했다. 쉬이 그치지 않을 것이었다. 우산은 없었고, 세이지는 비참하게 하교하게 될 터였다.
“역시 데려다줄게.” 키요시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하교 시간에 벌어질 실랑이를 미리 겪은 것이라고 칠까. 세이지는 축축하고 가라앉은 기분으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밀도가 다른 복도의 공기가 세이지를 맞이했다.
이것은 어렵지도 않다. 해치고 나아갈 수 있다.
그게 세이지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 …….” 오로지 돌아보지 않는 것, 그것 하나만을 지킨 채로 세이지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너무 가볍고 쉽게 농밀한 투명으로부터 벗어난다. 세이지는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숨을 크게 삼켰다가 내뱉으면 그때에서야 숨을 쉰다는 자각이 들었다. 물을 머금고도 가볍고 산뜻한 공기가 세이지를 채웠다.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이, 너무도, 너무도 쉽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