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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세키 세이지를 잃은 지 반년.
사실 그보다 더 되었을 수도,
덜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생의 시계가 제멋대로 멈추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시간과 날짜의 개념이 제대로 서지 않은지 꽤 되었으니까요.
당신은 그저 어떻게든 세이지가 쥐여 준 생을 움켜쥐고,
실낱같은 호흡만을 이어가고만 있을 뿐입니다.
그저 살아 있기에 살아갈 뿐인 삶.

하루쯤은 휴가를 써도 상관 없겠죠.
소파에 몸을 기대면, 어쩐지 지친 기분이 듭니다.
평소와 다른 것도 없는데 말이에요.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43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조금 틀어진 일과를 보내고 있던 당신의 귀에,
문고리에 열쇠가 걸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손이 몇 번인가 헛도는 듯 소리가 길게 이어집니다.
누구죠?
이 시간에 당신의 집을.
그것도 저렇게 자연스럽게 문을 딸 수 있는 사람이 있었나요?


문이 열리자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서는,
그보다도 익숙한 목소리와 인영이 키요시의 눈 앞에 서 있습니다.
맞습니다. 세이지입니다.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한 사에키 키요시,

| 기준치: | 45/22/9 |
| 굴림: | 29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이죠?



...... (그러다 일순간에 멎는다. 머리카락을 스치는 손길에는 실감이 있었다. 써늘하게 피가 식었다. 오싹한 소름과 함께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온몸의 혈관이 수축되는 것만 같은 긴장, 부족한 호흡 그리고 우습기 짝이 없는 희망이 시선에 담긴다. 눈을 맞춘다. 머리카락 주변을 배회하던 네 손을 먼저 잡아챈다. 말은 한참 뒤에 따랐다.) ...세이지.

...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분고분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잡힌 손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조금 흔들렸다. 여전히 서늘한 손아귀에 익숙하지 않은 힘이 실렸다. 다만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니, 말하지 마. 괜찮아. (가장 현실적이었고, 언제든 계산적일 수도 있었던 정신은 사고하기를 중단한다. 대신 앞에 선 네 허리를 끌어안았다. 네 몸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는다. 벌어진 입에서 조악한 숨이 쏟아져 나와 곧 입술을 빗겨 물었다. 가령 이것이 환영이고, 자신의 착란이라면 조금만 더 머물기를. 이제는 알았으니, 나에게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충분히 알았으니 지금은 네가 여기에 있기를 바랐다. 세이지, 하고 몇 번인가 너의 이름을 부른다.)

해가... 넘어갔겠네요. 날이 더워진 걸 보니. 거기에선 무엇이든 분명하게 보이질 않아서... (당신 못지 않게 현실감을 잃은 지는 오래였다. 눈앞이 까맣게 물들고 오랫동안 암전인 상태로 어떤 공간에 머물렀다. 어떤 때는 가물했고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공간은 멈춰있는 것 같았다가, 조금씩 흘러갔다. 시간과 계절이 지나고, 손에 쥐지 못하고 바라본 끝에 겨우 생각해냈다.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당신을 찾은 이유는…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그것을 말하기 위해.) 인사를 못한 것 같아서, 그때… … 제가 죽어버려서요. (그래서 그날 밤 만나지 못했다고, 집에 갈 수 없었다고. 이제 더는 당신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할 수 없었다.)

...그만해, 응? (고개를 들었다. 피로와 고통으로 붉은 금이 갔던 눈가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물기가 엉긴다. 네 허리를 안고 있는 열 개의 손가락 끝은 네 몸을 짓누른다. 이것이 나의 악몽이라면. 기어이 무너진 나약한 나의 정신이 만들어낸 환영이라면. 나는 어째서 이곳에서조차 웃는 너를 볼 수 없는지, 그 사실만이 원망스러웠다.)
이리 와. 괜찮으니까. ...알았으니까. 응? (그만해. 물기를 삼키느라 일그러진 목소리로 떨리는 손을 뻗었다. 네 목덜미를 감싸 허리를 숙이게 했다. 자세가 무너지는 것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며 품에 끌어와 너를 안았다. 기적을 믿지 않는다.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온다는 축일의 이변에 마음이 설렌 적 없다. 못다 한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아름다운 이별을 네게는 바라지 않는다. 떠안고 있던 가는 몸을 차라리 다리에 앉힌다. 뺨과 뺨을 맞비빈다. 내가 바랐던 것은 오로지 이것이었다. 함께 있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당연해지고 권태로워지는 순간까지, 내게 있어 여느 연애가 그러했듯 너와도 그렇게 되는 것. 정말로 그것뿐이었었다.)

(당신이 나를 잊고 원래의 궤도대로, 중력의 사정권 내로 돌아간다면 조금은 얄밉겠지만, 그것이 곧 자신이 알고 있는 사에키 키요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곳에 있되 전과는 같지 못했다. 그저 살아서 박동할 뿐인 심장에 귀 기울이면서,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음을 절감할 뿐이었다. 거짓말. 어르는 것인지, 애원하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목소리에 힘없이 중얼거린다.) 하나도 안 괜찮으면서요. …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괜찮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었다. 죽음은 예기치 않은 충돌처럼 삽시간에 일상을 바수어놓았으나, 무엇 하나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궤적을 따라 살아가는 나는. 태생이 이기적이고 고집스러운 나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에는 출근을 했다.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밥을 먹었다. 누우면 잠을 잘 수 있었고 다시 아침이 왔다. 누구도 나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슬퍼 보인다거나, 힘들어 보인다는 말 역시 들은 적 없다. 가끔은 스물로 생을 마감한 어린 너의 죽음에 지나치게 무감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온전했다. 온전하다고 생각했었다, 처음에는.)
...들켰어? (그러나 출근을 하면서도 넋을 놓는 일이 많아졌다. 뒤차의 클락션 소리를 듣고 나서야 희게 표백되었던 머리가 돌아올 때가 잦았다. 대화를 나누고 돌아서는 순간에 표정은 쉽게 사라졌다. 자리에 앉을 때는 이따금 고개를 숙였다.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생각했다. 먹는다는 행위가, 치아에 저작되는 그 감각이 치욕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머리로 한참을 뒤척였다. 냉장고에는 술이 늘었고, 잠들지 못하는 새벽에는 한 캔씩 마시며 베란다에 혼자 서서 야경을 보곤 했었다. 옆자리를 비워둔 채로. 그러면 아침이 왔다.)
세이지, 나 좀 봐. (너를 마주한 순간에 그간의 내 반년이 온전치 못했음을 절감한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내가 이럴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를 나조차도 몰랐는데 너라고 알 리가 만무했다. 시선을 마주친다. 애틋함으로, 혹은 간절함으로 떨리는 손끝을 힘주어 누르며, 그렇게 숨기며 억지로 입매를 접어 웃었다. 이것은 악몽일까. 내가 만들어낸 환영이나 나약한 정신의 빚은 착란일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줄곧.

보니까 좋네요. (손이 지나는 자리를 하나하나 훑었다. 그대로 웃음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원하는 대로 웃어주지 못할 것 같아 미안했지만… 그것만은 의외로 쉬웠다. 어느 시간이어도, 어떤 형태든 좋으니, 한번을 다시… … 그렇게 절박하게 생각했던 때가 있으니까. 고개를 든 순간 번지는 전조등과 굉음과 뒤집어지는 시야 뒤로, 힘을 주어도 움직이지 않는 손끝과 짓눌린 채 꺼져가는 숨 따위로 시시각각 직감한 적멸 앞에서, 마지막까지 바라던 것이었으니까.) 보고싶었거든요. 저는.
(다시 눈을 뜬다면 가장 먼저 마주하고 싶었고, 그런 헛된 희망을 놓지 못해 흑백 속에서도 한참을 외면했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기적 따위가 아니다. 그저 누구의 미련으로 점철된 것인지 모를 진짜 마지막. 하루살이와 다를 바 없는 것을 살아있다고 하지 않는다. 곁에 있어줄 수 없으므로 많은 것을 돌려줄 수 없다. 실체가 있는 망령. 그 뿐일 대답이 큰 의미를 갖지 않기를 바라며… …열기가 몰린 눈을 감았다.) …물어보세요.

(감은 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에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눌렀다. 눅신눅신한 물기를 머금은 소리를 다시 한번 삼킨다.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러나 물어야 했다.) 아프진 않았어?
(예정에도 없었던 회식 자리. 고작 상사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참석했던 가벼운 자리였다. 나는 고작 그걸로 너를 잃었다. 눈 대신 비가 오던, 여느 때와 다름없던 도쿄의 겨울밤에. 네가 타고 있던 버스가 전복되던 그 찰나에, 나는 누군가와 술잔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그게, 참 오래 이해할 수 없었다.)

... ...저는 그런 것밖에 못 남겼어요? (두 해 남짓한 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시간을 함께했다. 단조로운 일상이었지만 처음인 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죽음은 빠듯해 많은 것을 놓아야 했지만 모든 것을 두고가지는 못했다. 미련은 있었으나, 후회는 없었다. 모든 것은 하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날, 내가 할 수 있었던 것과 할 수 없었던 것을 헤아리기보다, 당신에게 해줄 수 있었던 것과 해줄 수 없었던 것을 가늠하기보다. 하지 말아야 했던 것과 하고 싶었던 것을 나누기보다는…) 여전히 좋아해요. … … (그것이 아팠으므로, 그러니 더 오래 좋아하지 못하는 것을, 당신도 그런 것만을 아쉬워하기를 바랐다.)

공기가, 있잖아. 네가 없는데도 공기나, 그런 것들이 말이야. 너무 태연했어. (다시 하나. 오래도록 누군가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낸다. 태연함에 대하여. 네가 사라졌는데도 세상은 천연덕스러웠다. 추위는 변함이 없었고, 바람은 구태의연했으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하루를 살았다. 그게 이상했다. 너는 없는데 이 세상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 너의 죽음이 조그만 점 하나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 ...그러니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나는.
(안고 있던 네 몸을 소파에 눕힌다. 좋아한다는 그 말에 표정은 사라진다. 네가 있던 때가 나의 이탈이고, 지금은 그저 본래로 돌아온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세이지, 우주에서는 말이야. 우주에서 만나기 위해서는 말이야. 아주 작은 착오로도 궤도의 높낮이가 변하기에 영영 길을 잃을 수도 있대. 영원히 돌아올 수 없게 된대.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좋아해. 나도 그래.
(고개를 숙인다. 깨물고 있던 마른 입술이 마음에 걸리고 마는 것이 내게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기에 입술을 맞춘다. 끝까지 네가 바라는 것은 해줄 수 없는 모질고 부족한 사랑이다.)

이제는, 두고 가도 되는데… … (살아 있다. 그러므로 숨을 쉬는 것은 당연하다. 이왕이면 맛있는 밥을 먹고, 웃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밤이면 쉬기 위해서 눈을 감는 것. 그 당연한 순간을 거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산다는 것에 이질적인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까지 해서 남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오래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도 나로 인해 외로움을 알게 됐다면, 책임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속죄로 마지막까지 손에 들린 애정을 포기하겠다고.)

네 얘기를 할 사람이 없었어. (너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할 사람이 내게는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너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네가 오래 자리를 비웠는데도 누구도 너의 부재를 내게 묻지 않는다. 그 허망함이, 나는 가장 외로웠던 건데.) ...나한테는 아무도 없었어. 정말로.
...그러니까 세이지. 그만, 응? (너의 물건 중 그 어떤 것도 버리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채 이곳에서 너를 기다렸던 것 같다, 나는. 그 겨울에서 멈춘 채로, 결국에 두고 가지 않는다는 약속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맞았다는 것을 실감하며 남겨져 있었다.) 지금은 그냥 같이 있어 줘.
같이 있어 줘. (나의 가장 유일했고 변칙적이었던 사랑. 지금, 바라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 너를 보며 나는 내 사랑이 결국엔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입을 벌려 네 아랫입술을 머금으며 눈을 감는다. 명치를 짓누르는 고통에 숨을 삼킨다. 너의 장례를 치르면서도 흐르지 못했던 눈물이 기어이 새어 나왔다.)

… … (결국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이 당신을 살게 할 수 있을지, 무엇으로 빈자리를 메꿀 수 있는지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입술을 겹쳐오면 목에 익숙하게 팔을 감았다. 입술 사이로 짠 맛이 고여들 수록 매달렸다. 사랑이 모자랐다면, 느끼던 것이 군중 속의 고독이었다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고 간섭하지 않았다면, 안아주지 않았다면… … 어느 겨울에 남겨진 사람처럼 추운 얼굴로 줄곧 기다리는 것이 정말 나였다면. 해줄 수 있는 것은 달리 없었다.)

(고개를 물리지 않고 숨이 서로의 얼굴을 간지럽히는 그 거리에서 네 이름을 불렀다. 초라한 낯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인 채 네 목덜미에 이마를 기댔다. 묽은 숨이 터져 나와 한참을 숨죽여 골라내야 했다.) ...세이지. 옷부터 갈아입을까?
감기 들겠다. ...춥겠다.

(당신은 더는 나를 걱정할 필요 없다. 지금 이 몸이 식어도 내일 열병을 앓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느 때처럼 목이 마르다고 네게 드물게 투정을 부릴 일도, 잠긴 네 목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 일도 두 번은 없다. 남은 감기를 가져가겠다며 다정하게 입 맞추는 그런 일상이 이제는 없을 테니. 답지 않게 신경 쓰는 그런 약한 모습을 당신에게 보이지 않을 테니. 그러니, 지금은 그냥……) 이대로 있어요… (숨죽여 당신을 안았다. 그러면 충분히 따뜻했다.)

오늘 하루 뿐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에게 빛을 안겨주고, 다시금 빼앗아가려는 현실이 야속한가요?
그런 당신의 품에 안겨 안심하라는 듯,
부드러이 손을 쥐어 매만지던 세이지의 상이 이지러집니다.
울고 있나요?
아뇨.
그보다는 조금 더 암전에 가까운,
……
눈을 뜨면, 당신은 온전한 백색의 공간에 앉아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상 · 하 · 좌 · 우 모든 것 이 백색으로 가득 차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이 바닥인지조차 의심이 갈 정도로 기이한 공간입니다.

| 기준치: | 45/22/9 |
| 굴림: | 75 |
| 판정결과: | 실패 |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56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은 잠들었었죠.
그럼 여기는 꿈인가요?
그럼 이건 자각몽일까요?
키요시가 손마디를 뒤로 꺾든, 숨을 참든.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명확하게 자각이 될 뿐입니다.
가만히 앉아있어 봐야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곳은 마치 죽음처럼 고요해요.
당신은 앞 · 뒤 · 오른쪽 · 왼쪽.
어느 쪽이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래도 가야지. (하루라고 했으니 가야지. 앞으로 걸음을 향했다. 울지 못하고, 원망하지 못하고, 저주하지 못하는 나의 네가 있는 곳으로.)
누군가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당신의 앞에 어느 순간 하얀 테이블이 놓여있습니다.
백색 일색의 공간에서
이것이 테이블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아챈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그곳에 놓여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습니다.

종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에키 키요시.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나요?

당신이 모든 내용을 읽은 후,
그것을 머릿속에 새겨 넣고 나면,
백색의 공간이 뒤틀리는 것을 느낍니다.
어렴풋하면서도 익숙한 소리가 당신을 흔들어놓으며,
어느 순간 수면 밖으로 끌어내어지듯 급작스럽게 정신이 듭니다.
이건… 당신의 전화벨 소리입니다.

세이지는 여전히 당신의 팔 안에 있습니다.

전화기를 확인해 보면, 당신의 어머니입니다.

...무슨 꿈을 꾸고 있어? (나긋한 목소리가 샜다. 팔을 들어 네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아주 오래도록 그리웠던, 소중한 것을 대하듯 애틋한 손길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품 안의 존재를 깨우지도 않고,
한참을 바라보며 누워있으면,
어느덧 해가 저물 무렵입니다.
다홍빛의 노을이 창을 타넘어 당신들을 온통 적셔놓았으니까요.
네. 맞습니다.
하루가 끝나갑니다.
짧은 잠에서 깰 무렵,
세이지는 그 즈음 바빠졌습니다.
해야 하는 일을 차례로 해내듯,
그것이 언젠가의 일상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냉장실, 냉동실, 찬장을 확인하고,
제때 먹지 못한 것들을 모아 정리한 뒤,
어딘가 어수선한 집안을 치우며
도처에 그대로 남아있는 자신의 물건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다…
허리를 편 세이지는,
시계를 한 번 보더니,
주저하던 입을 뗍니다.

세이지는 엷은 웃음을 내비칩니다.
마치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기라도 했다는 양,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세이지, 이리 와. (웃음에는 웃음으로. 쉽게 스러지려고 하는 웃음을 애써 지으며 네게 팔을 벌리며 말했다. 예전, 우리가 아무런 걱정도 없이 사랑을 하던 때처럼.)


스물이라는 너의 나이도, 고작 2년도 채 되지 못한 만남과 그 반절도 되지 못한 연애도 말이야. (너의 죽음은 모든 과거를 슬프게 물들였고, 너의 미래를 지워버렸다. 우리를 앗아갔고, 우리를 훼손시켰으며 우리의 종결시켰다.) 그러니까... 그냥, 조금 더 있어주면 안 돼?
나는 보고 싶은데, 세이지가 내 나이가 됐을 무렵의 모습도 기어이 한 번을 보여주지 못하는 원망하는 얼굴이나 마음껏 웃는 얼굴 같은 것도 말이야.

…못해요, 저는. (제자리에 서있음에도 망설임 없이 거리를 좁히는 당신의 방식이야 말로 제게 있어 야속한 것이었다. 등져야 하는 사람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가장 달콤한 말로 회유하려고 들었다. 외로웠고, 외로워야 할 사람이 뿌리치기는 쉽지 않은 것이어서, 도리어 고통을 감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못 보여줘요. 곧 있으면 이 몸도 허물어질 거예요. 그때가 되면 저는 남아있지도 않아요. 역겨울 걸요. …그러니까, 제발. (이쪽은 보지 말고. 내가 떠난 자리를 오래 응시하지 말고.) 보내주세요. ……

네가 말하는 그 욕심이 내게는 너무 기꺼워서 보내주기가 정말로 싫다고 하면, 그래서 내가 가진 모든 방법으로 너를 붙잡아놓고 싶다고 하면... 뭐라고 할 거야?
...세이지,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내 자신이었어. (누군가는 목놓아 울고, 누군가는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고, 누군가는 화를 내며 발을 구르고, 누군가는 절망하여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처럼 어딘가에 틀어박히고 또 누군가는 감히 죽음을 결심할 때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나는 가장 견디기 어려웠어. 가장 정직했고 솔직할 수 있었던 부분, 가슴 안쪽의 가장 연하고 부드러운 부분이 훼손되고도 관성을 버리지 못한 채 웃고 밥을 먹고 생활하고 살아가는 내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치욕스러웠어.)
그러니 너는 아무것도 묻지 말고. 너무 괴롭지도 말고, 그냥... 곁에 있어 줘. (둘 중 하나가 죽고 나서도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는 우리의 이야기는 결코 순결하게 적힐 수 없다. 실패한 사랑은 아름답지 못하다. 남겨진 사람이 웃을 수 있는 미담은 실재하지 않는다.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무심코 네 팔목을 쥔다. 눈이 마주쳤을 때는 문득 등골이 서늘해졌다. 공포와 비슷한 절박함. 그러나 그것은 공포가 아니다. 눈알의 흰자위를 붉게 만들고 발끝을 선득하게 하는 것은. 뜨겁게 달군 칼날을 삼킨 것처럼 심장을 오그라들게 하는 것은. 충분히 너를 알면서도 악취를 내뿜는 이기를 부리게 하는 것은. 가장 현실적이었고, 언제든 계산적일 수도 있었던 정신이 사고를 중단하게 하는 것은. 그리하여 기꺼이 우둔한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은.) ...사랑해.
(그건 사랑이다. 잔인하고, 타산적이고, 야속하며 찌꺼분하게 눌어붙어 있는 감각이야말로, 나의 사랑이다. 달콤한 말로 회유하고, 군데군데 금이 가 있는 너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파고들고, 고통을 채근하는 것이 나의 사랑이다.) 같이 있자.

죽기 싫었어요. (한 글자 한 글자 힘겹게 눌러 말했다. 나도, 당신도 무고했던 한 번의 죽음. 그때, 나는 마지막까지 살고 싶었다. 어떻게든 죽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간절하게,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불온한 것이든, 존재하지 않을 그런 신성한 것에든 구차하게 매달려서라도. 욕심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누구와는 달리 평범한 어른이, 썩 괜찮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든가, 뒷 이야기가 궁금한 책이 남았다거나… 길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고양이를 한 번쯤 안아서 집에 돌아오고 싶었다는 것 말고, 언젠가는 마당이 넓은 집에서 살고 싶은 게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늦은 밤, 내 생각이 나서 사왔다는 실없는 안주에 웃음 짓고, 자기 전에 그날 있었던 일을 나누다, 아침에 울리는 알람과 아쉬운 듯 붙어있는 몸을 끌어안는 것으로 지난한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깨닫는, 그런 평범함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건, 끝과 시작이 동일한 단어라고 느껴질 즈음. 피는것과 지는 것이 같다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목이 막혔다. 그건 당연한 거였다.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본능과도 같이, 어둠이 아닌 빛을 갈망하는 것과 같이. 따뜻한 것을 찾아 파고드는 습성과 같이, 나도 어쩔 수 없이…) ……살고 싶었어요.
… 그게 사에키 씨의 욕심이에요? (당신은 언제나 내가 모르기를 바라지만, 나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음성이나 어조, 말 사이 들이는 뜸 만으로도 어떤 말을 하고 싶은 지 알았다. 그곳에 쌓인 수많은 살덩이와 핏물 속에서 깨어나며, 희망과 절망이 뒤엉킨 사람의 가장 처절한 민낯을 마주하며 순환하는 세상의 섭리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남은 삶을 삶으로,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의 비참한 인생을. 나는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정말 그런 걸로… … 그것만으로,
살아갈 수 있어요? (그런 일을 행해야만 했던 그들의 마음에 대해서 물어본 적 없다. 그것이 틀렸다고 말하거나, 옳다고 말하는 것 대신. 그렇게 해야만 숨 쉴 수 있었던, 갈무리하지 못한 사랑들에 대해 묻는다. 지나왔고 지나가야 할 당신의 모든 삶에 대해서.)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니까 언젠가는 후회할지도 모르지. 더 좋은 방법이 생겼다면, 진작 주어지지 못했다는 것에 화를 낼지도 몰라. 시간이 흐르는 게 두려운 날이 있을지도 모르고, 정작 우리 앞에 놓인 게 진창 같은 생활일지도 몰라. (내뱉는 말과 달리 차분하고, 어딘지 홀가분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그쯤 멎는다. 시선을 맞춘다. 도저히 잊고 싶지 않았던 깊은 빛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그래도 살아갈 수 있어. (살아갈 수 있다. 도로를 지나는 버스가 보일 때마다 넋을 놓을 필요가 없다. 웃는 것에서 죄책감을, 밥을 먹는 것에서 치욕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혼자서 잠들지 않아도 되고, 그렇지 못한 새벽을 내내 지새우며 이미 종결된 너의 기억을 채우지 않아도 된다. 만약 그날 내가 회식을 거절한 뒤 너를 데리러 갔다면, 전화를 했더라면, 차라리 욕심을 버리고 다음날 만나자고 했더라면. 답을 할 수 없고 해봤자 무용한 질문들을 줄 세울 필요가 없다.) 맞아, 내 욕심이야.
(미안해. 그 말 뒤에는 그러니 살아달라고, 죽지 말아 달라고, 나와 함께 나란히 내일의 햇볕을 쬐자며 속삭인다.)
(고개를 숙이며 마른 두 개의 입술을 가볍게 겹친다. 떨어진 뒤에는 주방에 놓여있던 칼로 두 번째 손가락을 그었다.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받게 될 것이 더욱 크다는 걸 알아서였다. 점점이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을 닦지 않은 채 그대로 네 소매를 걷어 하얀 팔 안쪽에 붉은 획을 긋는다. 자신의 한자 석 자를 새긴다. 사고는 마비된 채다. 생의 전이를 사용한다.)
...보고 싶었어, 세이지.
대답을 들은 세이지는 당신에게 순순히 팔을 걷어 내밉니다.
붉은 선이 팔뚝을 따라 그어 내려지고,
그 손바닥에 한 획씩 당신의 이름이 그어 내려집니다.

모든 문자가 새겨지면,
그것은 마치 영혼에 새겨진 각인처럼 피부 속으로 스며듭니다.
당신은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얄팍한 피부 아래의 고동이,
이제는 오롯이 당신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요.
후지세키 세이지, 사에키 키요시 생환?
세이지와 키요시는 743 시간 후에 죽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